글과책/수필집
게임 사업의 져니맨
게임 사업의 져니맨
2024.11.30누구나 그랬겠지만, 나 역시 어린 시절 '횡단보도 흰 선 밟기 놀이'를 자주 하던 어린이였다. 흰 선 밟기에 실패하면 '아까는 연습 이제는 진짜'라고 다짐하며 마음속으로 다시 '시작!'을 외치고 선을 밟았다. 내가 만족할 때까지 스스로에게 무한한 기회를 주는 그 놀이를 할 때면 목숨이 999개인 슈퍼 마리오가 된 것 같았다. 약간 망하더라도 걱정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실패는 없던 일이 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과연 직장 생활도 그랬음 얼마나 좋았을까. 직장인에게 커리어란 '걸어온 길'이라는 멋진 의미도 있겠으나, 애석하게도 내가 경험한 커리어는 '흰 선 밟기에 실패하면 무효 처리가 되지 않는, 이력의 흔적이 분명하게 남는 경기 기록'에 가까웠다. 낭만적이기보다는 무시무시한 단어였다. 애초에 번복..
게임이 잘났지 내가 잘났냐
게임이 잘났지 내가 잘났냐
2024.02.17'흑마법사의 계략으로 버섯으로 변해버린 인간이 본래 모습을 찾아 흑마법사를 무찌르기 위해 떠나는 여행' 컨셉의 중국 게임이 국내 게임 매출 1등에 올랐다. 간혹 미소녀 게임이 리니지의 왕좌를 위협한 경우도 있었으나 IAA(인앱광고: 광고를 시청하고 보상을 얻는 방식)를 탑재한 게임이, 그것도 중국 느낌이 묻어나는 게임이 매출 1등을 한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게이머들은 은근히 이 소식을 통쾌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작년에 신작을 런칭할 때도 느꼈던 거지만 견고했던 MMORPG의 성벽이 조금씩 허물어져가는 느낌을 받는다.리니지가 시장의 최고 전성기였던 시절이 있었다. 딱 그 시점부터 게임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던 나는 리니지라이크 중심으로 게임 사업을 배웠다. 특별히 그 장르에 내가 탁월했다기보..
독후감의 쓸모
독후감의 쓸모
2024.02.06나는 전형적인 예술병을 가진 굼벵이 작가다. 이따금씩 '어떻게 이런 걸 썼지?'하고 스스로 감탄하는 에세이를 쓰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내가 원할 때 아주 간헐적으로만 글을 써오며 스스로에게 취하는 삶을 보냈다. 그러다 작년 11월부터 부지런히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겨 플랫폼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2달 정도 되었는데 아직까지는 내 글을 알리기도 힘이 부치는 한미한 형편이다. 맘만 먹으면 바로 인기 작가로 등극할 줄 알았는데, 역시 인생은 실전이야⋯내 경우 이야기를 짓는 재주가 부족해 주로 에세이를 쓰는 편이다. 다만 번뜩이는 글감이라는 것은 매번 찾아와주는 건 아니라서, 읽고 있는 책을 에세이 형태로 쓰는 것을 정기적으로 시작했다. 책의 주요 메시지를 바탕으로 나만의 생각을 재구성해서 쓰는 글이..
내가 남평 문씨 귀족 영애라고?
내가 남평 문씨 귀족 영애라고?
2024.01.30피로에 지쳐 잠들었다 깨어난 곳은 황족 방계 문 에르메스 가문? 그리고 내가 하나밖에 없는 영애 디아나라고? 라는 세계관이 있다면 꼭 한번 환생해보고 싶다. 이세계 애니를 많이 봐서 그런지 서른이 넘은 지금도 종종 귀한 가문의 자제로 살아가는 생각을 한다. 오늘은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떤 과자를 구울지 고민하는 게 주요 일과가 되는 태평한 삶이다. 몇 달 전 뜨개질에 빠졌을 때 동료 R과도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뜨개실 사러 스위스도 가고 일본도 가고. 아무 부담 없이 그냥 가는 거야. 아 얼마나 행복할까" 내가 꿈꾸는 귀족 영애란 말하자면 시간계의 워렌버핏이다. 돈도 많은데 시간까지 많은 워렌버핏,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신분이다. 아쉽게도 현실에서는..
나로부터 내러티브
나로부터 내러티브
2024.01.19영화 이야기로 가볍게 시작하자면 '인타임'에서는 모든 가치가 시간으로 대체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커피 한 잔은 4분, 자동차는 30년 뭐 이런 식이다. 모든 사람들은 일을 하고 시간을 급료로 받으며, 시간이 사라지면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래서 부자들은 영생을 살게 되는 설정이다. 흥미로운 소재라 생각했다. 비유적이지만 시간은 개인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가치니까. 그런데 만약 비유가 아니라 앞으로 '시간이 값 비싼 가치가 되는 시대'가 진짜로 펼쳐진다면? 새로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하며, 또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까? 일을 하고 시간을 월급으로 받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우리는 분명히 시간의 선택을 받으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기껏해야 VBA 사무 자동화 정도였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귀에 ..
야 이 공지 누가 썼냐?
야 이 공지 누가 썼냐?
2023.12.20게이머 사이에는 예로부터 2개의 전설이 내려온다. 하나는 게임 출시한다고 광고는 다 해놓고 막상 들어가면 서버가 터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규모 업데이트라며 기대하라 해놓고 하루종일 임시 점검을 때린다는 거다. ‘서버에 접속할 수 없습니다’ 또는 ’82ST5(대충 숫자) error’ 같은 팝업창을 보면 ‘역시 그렇지’하면서 오늘도 전설이 맞았음을 깨닫는다. 게시판만 봐도 다들 안된다고 난리가 났는데 이놈의 게임 회사 직원들은 왜 재깍재깍 공지를 올리지 않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기다리다 ‘공지 떴다’ 말을 듣고 보면 ‘현재 확인 중입니다’는 짧은 내용만 올라와있다. 도대체 게임을 운영할 생각이나 있는 걸까? “이런 공지는 도대체 누가 쓰냐”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게 나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바로 ..
겜잘러에 치이는 삶
겜잘러에 치이는 삶
2023.12.09"아이온을 고 3 때 열심히 했었어요! 나중에 아이온 회사에 취직한다고 했는데 정말로 왔네요 하하하"는 사업 PM 인턴 근무 첫날에 '디아나는 게임 좋아해요?'라는 질문에 한 대답이었다. 반은 맞다. 고3시절 안 하던 컴퓨터 게임에 느닷없이 빠져버린 건 진짜였다. 하지만 게임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할 대답은 아니었다. 저런 대답은 게임이 좋아서 게임 회사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니까. 그저 '인턴 전환'이라는 미션을 클리어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발휘한 기지였다. 당시 나는 무지성 공채를 넣다가 전환형 인턴을 하는 중이었고, 이 회사가 그 게임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서류를 넣을 때 알았다. 여하튼 게이머 코스프레와 성실함을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하게도 전형에 최종 합격했다.그렇게 나는 게임을 만드는 일을..
성실함의 문장
성실함의 문장
2023.12.06어릴 때 라는 애니메이션을 즐겨봤다. 거기에는 선택받은 아이들이 8개의 문장을 가지고 세계를 위협하는 악당 디지몬을 물리치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주인공은 용기의 문장, 라이벌은 우정의 문장, 히로인은 사랑의 문장… 막내들은 희망과 빛의 문장을 가진다. 나는 특히 순수의 문장을 좋아했다. 문장은 누군가를 대표하는 키워드같아서, 나도 그런 문장을 줄곧 가지고 싶어 했다. 그 중에는 가지기 싫었던 문장도 있었다. 바로 정석이라는 캐릭터의 이었다. 왜 싫어했냐고 묻는다면, 성실은 왠지 하찮아보였다. 타고난 대단한 능력같은게 아니라 대단하지 않은 사람이 겨우 노력하는 것으로만 보였다. 성실은 그렇게 노력한 사람에게 마지못해 쥐어주는 명예훈장같은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렸을 때 나는 스스로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
그래서 기술이 뭐냐고요
그래서 기술이 뭐냐고요
2023.12.01블라인드에는 종종 [사업 PM의 쓸모]를 주제로 갑론을박이 펼쳐진다. 여론을 보면 '없어도 상관없다' 쪽이 조금 더 우세한 것 같다. 나는 필요하다는 사람의 말에도 공감하고, 필요 없다는 말에도 공감하는 편이다. PM은 회사의 방침, 조직의 규모, 게임 장르에 따라서 얼마든지 역할이 바뀔 수 있는 직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마다 놓인 상황이 다르기에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는 뜻인데, 이 말은 곧 기획/아트/개발처럼 독창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직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그래서 사업 PM이 가진 기술이 뭔데?'라는 말에 쉽게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개인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PM의 역할 및 태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사견이기에 이 글이 특정 그룹을 대표하지도 않고, 스스..
떠날 때 마음은 그 곳에 두고 가기로
떠날 때 마음은 그 곳에 두고 가기로
2023.11.20최근 조직에서 일하기 어려워 실장님과 면담을 했다. 여러 이유와 얘기들이 있었고 최종적으로 팀 이동을 고려해주셨다. 그리고 이번 금요일 다같이 모이는 자리에서 '디아나는 다른 팀에서 일 하기로 되었어'라고 공지했다. 생각보다 반응은 미온적이었는데, A는 메신저로 '???'를 보냈고 B는 미동도 없었다. 이번 변화에는 오는 사람과 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가는 사람'에 대한 반응은 조금 미덥지근 한 듯 했다. 처음에 조직 이동으로 결정이 났을 때는 신났는데 막상 다가오니 불편한 마음이 가득하다. 누군가는 부럽다고, 누군가는 서운하다 했기 때문이고, 누군가는 용기에 대한 보상이라 축하했고 누군가는 비슷하게 TO가 나면 추천해달라는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는 본인도 전배를 시켜달라 면담했..
포지션의 우선 순위
포지션의 우선 순위
2023.11.14얼마 전 서러운 마음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지요. 평소 같았으면 한 귀로 듣고 흘렸을 텐데, 행사 준비로 쌓인 것도 있고 피로했던 지라 그냥 넘길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지스타 출장 기간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비록 선생님은 제가 울었던 걸 보지는 못했지만 제가 속이 상했던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모두다 떠난 다음날 따로 대화를 했죠. 저 역시 선생님의 의도가 나쁘지 않았던 걸 알고 있었기에, 당신의 의중은 이해하지만 다음부터는 특별히 조심해 달라고 말했더랬죠. 그날 선생님의 말은 위에서 아래로 줄을 세우는 다소 권위적인 이야기였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전했기 때문에 개의치 않답니다. 선생님도 잘 들어주셨고요. 우리 팀의 리더, 팀장인 당신에게 저는 여전히 좋은 감정을 ..
관계의 온기
관계의 온기
2023.11.141 누구에게나 온기가 있다. 모두 소중한 사람과 포옹하고 사랑한다 속삭이며 살아간다. 남이 보는 온기의 정도는 다를 수는 있겠지만, '나 정도면 정이 많은 편 아닌가'라 느낄만한 각자만큼의 온기를 가지고 살아간다. 이 주장은 성선설이고, 인류애이며, 순정이 있는 깡패 곽철용의 이야기 이기도 하다. 나는 우리 모두가 다정한 눈빛을 가지고, 남을 위해 미소 지을 수 있는 삶을 산다고 믿는다. 2 그러나 종종 집 밖을 나서면 온기에 대한 믿음들이 산산조각난다. 나를 반기지 않는 작은 적에게 상처 받고, 남을 반기지 않는 나를 보며 실망하기 때문이다. 사랑받지 못한 오늘을 떠올리며 집으로 터덜터덜 걷는다. 건강한 마음으로 큰 그릇으로 모두를 품고자 했으나, 타인의 온기에 영향을 받는 나는 너무나 미숙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