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책
희미한 기쁨을 걸어가
희미한 기쁨을 걸어가
2024.12.07두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고 여러 번이고 눈을 비볐는지 모른다. 아주 희미하여 보인다고 말하기 민망한 선분을 찡그리며 쳐다봤다. 어릴 적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에게만 보이는 특별한 요정이 내 앞에 나타난 것만 같았다. 흐릿한 요정이 말했다. "내가 보인다면, 넌 이제 희미한 기쁨을 걸어갈 준비가 된 거란다"두 줄을 봤다. 코로나 진단 키트는 아니었고 얼리 테스트기였다. 며칠 전에도 숱한 한 줄을 봐왔던 터라, 남편인 동글이에게 장난치듯 "나 하고 온다!"라는 말을 남기고 화장실을 다녀온 참이었다. 천천히 물드는 테스트기를 바라보며 "흠 없네"라고 말은 했지만 혹시 모른다는 마음으로 5분 알람을 맞췄다. 띠 띠 띠- 알람이 울리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테스트기를 보기 위해 일어났다. 아가를 맞이하는 모든 ..
PM의 모든 것과 막역해지기
PM의 모든 것과 막역해지기
2024.12.04헉..헉.. 여기가 게임 업계에서 사업 PM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려주는 곳 맞죠??라고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와 문을 덜컥 열고 묻는다면 나는 도대체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사업 PM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부터 오랫동안 고민했다. 음 PM 이야기를 하긴 할 건데, 그렇다고 정석을 알려드리는 건 아니고요.. 어 그러니까.. 하며 어버버 말을 하게 되지 않을까. 이 브런치북은 그런 사람이 쓰는 PM에 대한 글이다. 정통성과 신빙성을 따진다면 못 미더울 수 있다는 뜻이다.직업병일 수도 천성일 수도 있지만 모든 것에는 정답이 없다 생각하는 편이다. 여기서 정답이란 다른 이들에게 적용하면 똑같은 결과값을 얻을 수 있는 입력값 같은 개념이다. 확실하게 망하는 정답은 있겠지만, 잘되는 정답지란 살..
게임 사업의 져니맨
게임 사업의 져니맨
2024.11.30누구나 그랬겠지만, 나 역시 어린 시절 '횡단보도 흰 선 밟기 놀이'를 자주 하던 어린이였다. 흰 선 밟기에 실패하면 '아까는 연습 이제는 진짜'라고 다짐하며 마음속으로 다시 '시작!'을 외치고 선을 밟았다. 내가 만족할 때까지 스스로에게 무한한 기회를 주는 그 놀이를 할 때면 목숨이 999개인 슈퍼 마리오가 된 것 같았다. 약간 망하더라도 걱정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실패는 없던 일이 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과연 직장 생활도 그랬음 얼마나 좋았을까. 직장인에게 커리어란 '걸어온 길'이라는 멋진 의미도 있겠으나, 애석하게도 내가 경험한 커리어는 '흰 선 밟기에 실패하면 무효 처리가 되지 않는, 이력의 흔적이 분명하게 남는 경기 기록'에 가까웠다. 낭만적이기보다는 무시무시한 단어였다. 애초에 번복..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독서 에세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독서 에세이
2024.11.27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비독서를 포함하는 새로운 독서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책이다. 2007년에 프랑스에서 출간되어 대중과 평단과 언론의 찬사를 받은 책으로, 전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온 독서문화와 그에 대한 금기를 되짚어본다. '이런 책은 꼭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독서의 목적과 방법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이 책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다는 사회적 금기를 깨뜨리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저자피에르 바야르출판여름언덕출판일2008.02.20피에르 바야르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독서 리뷰아닌 게 아니라 이 '비독서'라는 개념은 읽는 것과 읽지 않는 것, 이 양자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어야 성립되지만 사실 ..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필사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필사
2024.04.19친구라는 단어는 단 하나도 들어가있지 않지만, 내게는 또렷하게 친구라는 의미로 보이는 그런 글이었다. 좋아하는 작가님의 글을 보고 생각이 나서 블로그에 남겨둔다. 나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이 다른 누군가와 더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안도를 느낀다. 내가 그 선한 양의 무리 속에서 늑대가 아니라는 사실에 기쁨을 느낀다. 그들과 함께하면 평화롭고, 그들과 함께하면 자유롭다. 그것은 사랑이 가져다 줄 수도, 빼앗아갈 수도 없는 소중한 것이다. 나는 창문과 대문을 서성이며 그들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마치 해시계처럼 무한한 인내심으로 항상 너그럽게 그들을 이해한다. 사랑이 결코 이해 못하는 것을. 언제나 관대하게 용서한다. 사랑이 결코 용서 못하는 것을. 첫 만남부터 편지를 주..
야만인을 기다리며 독서 에세이
야만인을 기다리며 독서 에세이
2024.04.14야만인을 기다리며 - 저자 존 쿳시 출판 들녘 출판일 2003.09.04 존 맥스웰 쿠체 『 야만인을 기다리며 』 독서 리뷰 "저들에게 말을 해. 왜 우리가 여기에 왔는지 얘기하라고. 저들에게 네 얘기를 해 진실을 얘기해" 그녀는 나를 옆눈으로 바라보면서 엷은 미소를 짓는다. "제가 정말 진실을 얘기하기 바라세요?" "진실을 얘기해. 그것 말고 달리 얘기할 게 뭐 있어?" 미소가 그녀의 입술을 떠나지 않는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고 침묵을 지킨다. 어느 시대든 공동의 적이 생기면 집단은 힘을 얻었다. 제국주의 시대도 그랬고 현대에는 팀장을 욕하는 팀원들도 그렇다. 집단은 공동의 적을 매개로 끈끈해졌으며, 어떨 때는 이방인이 집단의 존재 이유가 되기도 했다. 사실 적이 얼마나 악한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
어린이라는 세계 독서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 독서 에세이
2024.04.07어린이라는 세계 어린이는 잘 보이지 않는다. 몸이 작아서이기도 하고, 목소리가 작아서이기도 하다. 양육이나 교육, 돌봄을 맡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 곁에 어린이가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기 쉽다. 10년 남짓 어린이책 편집자로 일했고, 지금은 독서교실에서 어린이들과 책을 읽는 김소영은 어린이의 존재를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해 부지런히 글을 쓰고 목소리를 내 왔다. 이 책에는 김소영이 어린이들과 만나며 발견한, 작고 약한 존재들이 분주하게 배우고 익히며 자라나는 세계가 담겨 있다. 이 세계의 어린이는 우리 곁의 어린이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가 통과해온 어린이이기도 하며, 동료 시민이자 다음 세대를 이루는 어린이이기도 하다. 독서교실 안팎에서 어린이들 특유의 생각과 행동을 유심히 관찰..
팥:나 심은 데 나 자란다 독서 에세이
팥:나 심은 데 나 자란다 독서 에세이
2024.03.05팥: 나 심은 데 나 자란다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겨울이면 가슴속에 3,000원을 품고 사는 민족 아닌가. 길거리에서 불시에 겨울 간식들을 만난다 해도 언제라도 현금을 꺼낼 수 있도록. 누군가는 현재 내 위치를 기반으로 주변의 붕어빵 파는 노점을 알려주는 맵을 개발했을 정도로 진심이다. 그뿐인가. 절기를 중요시 여기는 우리 민족은 밤이 가장 긴 동짓날 팥죽을 끓여 집안 곳곳에 두어 귀신과 액운 쫓아내는 풍습을 가졌다. 팥죽에는 나이 수대로 새알심을 넣어 건강을 기원한다고도 한다니, 어쩐지 팥은 한국인의 정서를 그대로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기’ 전문가로서 『빵 고르듯 살고 싶다』 『읽는 생활』 『아직, 도쿄』 『사물에게 배웁니다』 등 다수의 책을 통해 빵, 커피, 종이로 만든 모..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독서 에세이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독서 에세이
2024.02.24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김신지 작가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독서 리뷰어렸을 땐 방학이 시작될 때마다 생활계획표를 짰다. 어린 마음에도 나름 어느 정도의 '균형'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이만큼 놀고, 이만큼 공부, 틈틈이 심부름, 다시 이만큼 놀고⋯ 나의 즐거움을 챙기는 것과 생활을 돌보는 적당한 의무를 잊지 않던 나날. 그때처럼 시간의 주인이 나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려면 우리는 무엇부터 해야 할까?언젠가부터 시간이 사라졌다. 시간을 팔아 돈을 벌면 그 돈으로 다시 시간을 사길 반복했다. 직장인의 책임감으로 '지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시간을 바치기도 했다. 열심히 사는 삶은 좋은 것이라 배웠는데, 왜 그럴수록 내 삶은 소홀해지는 기분이 드는 걸까. 나를 이루었던 수많은 다정을 바쁘다는 이유로..
게임이 잘났지 내가 잘났냐
게임이 잘났지 내가 잘났냐
2024.02.17'흑마법사의 계략으로 버섯으로 변해버린 인간이 본래 모습을 찾아 흑마법사를 무찌르기 위해 떠나는 여행' 컨셉의 중국 게임이 국내 게임 매출 1등에 올랐다. 간혹 미소녀 게임이 리니지의 왕좌를 위협한 경우도 있었으나 IAA(인앱광고: 광고를 시청하고 보상을 얻는 방식)를 탑재한 게임이, 그것도 중국 느낌이 묻어나는 게임이 매출 1등을 한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게이머들은 은근히 이 소식을 통쾌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작년에 신작을 런칭할 때도 느꼈던 거지만 견고했던 MMORPG의 성벽이 조금씩 허물어져가는 느낌을 받는다.리니지가 시장의 최고 전성기였던 시절이 있었다. 딱 그 시점부터 게임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던 나는 리니지라이크 중심으로 게임 사업을 배웠다. 특별히 그 장르에 내가 탁월했다기보..
독후감의 쓸모
독후감의 쓸모
2024.02.06나는 전형적인 예술병을 가진 굼벵이 작가다. 이따금씩 '어떻게 이런 걸 썼지?'하고 스스로 감탄하는 에세이를 쓰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내가 원할 때 아주 간헐적으로만 글을 써오며 스스로에게 취하는 삶을 보냈다. 그러다 작년 11월부터 부지런히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겨 플랫폼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2달 정도 되었는데 아직까지는 내 글을 알리기도 힘이 부치는 한미한 형편이다. 맘만 먹으면 바로 인기 작가로 등극할 줄 알았는데, 역시 인생은 실전이야⋯내 경우 이야기를 짓는 재주가 부족해 주로 에세이를 쓰는 편이다. 다만 번뜩이는 글감이라는 것은 매번 찾아와주는 건 아니라서, 읽고 있는 책을 에세이 형태로 쓰는 것을 정기적으로 시작했다. 책의 주요 메시지를 바탕으로 나만의 생각을 재구성해서 쓰는 글이..
내가 남평 문씨 귀족 영애라고?
내가 남평 문씨 귀족 영애라고?
2024.01.30피로에 지쳐 잠들었다 깨어난 곳은 황족 방계 문 에르메스 가문? 그리고 내가 하나밖에 없는 영애 디아나라고? 라는 세계관이 있다면 꼭 한번 환생해보고 싶다. 이세계 애니를 많이 봐서 그런지 서른이 넘은 지금도 종종 귀한 가문의 자제로 살아가는 생각을 한다. 오늘은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떤 과자를 구울지 고민하는 게 주요 일과가 되는 태평한 삶이다. 몇 달 전 뜨개질에 빠졌을 때 동료 R과도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뜨개실 사러 스위스도 가고 일본도 가고. 아무 부담 없이 그냥 가는 거야. 아 얼마나 행복할까" 내가 꿈꾸는 귀족 영애란 말하자면 시간계의 워렌버핏이다. 돈도 많은데 시간까지 많은 워렌버핏,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신분이다. 아쉽게도 현실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