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부터 내러티브
영화 이야기로 가볍게 시작하자면 '인타임'에서는 모든 가치가 시간으로 대체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커피 한 잔은 4분, 자동차는 30년 뭐 이런 식이다. 모든 사람들은 일을 하고 시간을 급료로 받으며, 시간이 사라지면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래서 부자들은 영생을 살게 되는 설정이다. 흥미로운 소재라 생각했다. 비유적이지만 시간은 개인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가치니까. 그런데 만약 비유가 아니라 앞으로 '시간이 값 비싼 가치가 되는 시대'가 진짜로 펼쳐진다면? 새로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하며, 또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까?
일을 하고 시간을 월급으로 받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우리는 분명히 시간의 선택을 받으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기껏해야 VBA 사무 자동화 정도였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본 AI의 흐름에 시대가 올라탔기 때문이다. 손품을 팔던 때와 달리 조건문만 잘 설정하면 효율적으로 일을 끝낼 수 있고, 창작의 영역에서도 내 글을 다듬고 다른 형태로 보여주는 결과물을 보며 많은 영감을 얻기도 한다. '소모되는 시간의 종말'인 셈이다. 최근에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유튜브 영상을 요약해서 깔끔하게 보여주는 AI 서비스가 생겼다는 소식이었다. 써보니 정확도도 상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한 편으로는 '이제 긴 콘텐츠는 이걸로 돌려봐야겠다. 개꿀!'이라는 생각과 '앞으로는 누군가에게 선택받는 것이 더 어려워지겠구나'하는 철렁함을 느꼈다. AI의 지배를 받지는 않겠지만, 그저 그런 정도의 가치는 타인에게 도달되지 못한 채 AI 선에서 입구 컷 당하겠다 싶었다. 요약기에 넣지 않고 기꺼이 시간을 투자해 볼만큼, 나의 글과 콘텐츠는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걸까.
내러티브의 원칙
내 기준에 이 문제의 답은 '내러티브가 얼마나 중요해지는가'에 달려있다. 일반적으로 내러티브는 이야기 개연성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과거-현재-미래 시간적으로 설명되는 입체적인 개인의 모습에 가깝다. 또 각 시점에서 발생하는 경험과 생각이 구조적으로 만들어진 여러 페르소나이기도 하다. 본질은 '나의 이야기'다. 사실 수년 전부터 내러티브가 개인 단위로 확장되고 있었지만, 차이가 있다면 목적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브랜딩/팬덤/인플루언서 측면의 PR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모두가 내러티브를 활용해야 한다. 기존에는 플러스 요인이었다면 이제는 경기에서 유일하게 점수를 얻는 규칙이 될 수도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어찌 됐든 원칙은 하나다. 내가 끌고 갈 수 있는 유일한 이야기, 고유한 서사가 있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쉽사리 대체되지 않는다.
내러티브를 가지면 콘텐츠에 담긴 정보와 재미 요소가 아닌, 콘텐츠 자체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실패 없는 후쿠오카 맛집 리스트와 후기는 AI를 통해 요약되어 클릭 기회조차 잃어버리지만, 내러티브를 가진 누군가의 후쿠오카 여행은 기꺼이 시간을 내어 볼만한 선택지가 되는 셈이다.
다행인 점은 우리 모두 각자만의 서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시절 경험한 독보적인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남들과 비슷하기에 다 같이 공감하는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물론 '좋은 내러티브'라는 것도 당연히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희소한 경험이나 자극적인 소재가 좋은 내러티브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내러티브의 수준은 '보는 이가 얼마나 몰입하고 같은 마음을 공유하게 하느냐'로 결정된다. 보는 사람이 창작자와 같은 시선으로 경험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에서 배려하며 만들어야 비로소 좋은 내러티브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신에게 취한 글, 감정을 배설하는 글은 오래가지 못한다.
왜 내러티브가 선택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기존 사회에서는 '효율성'과 '손해보지 않는 방법'으로 생산성을 높였다면, 알고리즘과 다기능 AI로 그것이 당연한 뉴제너레이션 시대에는 '경험을 동일시'하며 교류하는 것에 더 의미를 두어서가 아닐까. 다만 우리가 가진 시간 자원은 한정적이고, 선택되는 과정에서부터 모든 문제가 시작된 것이 아닐까. 뭐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 진정으로 우리가 준비해야 할 길은 '대체되지 않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내 말이 틀릴 수도 있으나, 적어도 내가 내러티브를 시작하려는 이유는 이렇다. 이런 이유들로 여러 페르소나를 가진 복합적인 나에 대해 이야기를 겹겹이 쌓아두려고 한다. 생활형 에세이랄까 조금 더 살냄새가 느껴지는 이야기를 자주 써보려고 한다. 브런치에 <디아나러티브>라는 브런치 북을 만들었다. 시작은 '시대 변화에 맞춰 내러티브를 만들자'라는 거지만, 막상 하려니 나랑 비슷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시시덕거려도 충분할 것 같다.
게임업계 PM으로서, 30대 여성으로서, 기혼자로서, 글 쓰는 작가로서, 서평 쓰는 독자로서, OO마을에 사는 주민으로서 만들어지는 유일무이한 경험과 깨달음이 있다. 선망과는 구분된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과 공감하고 교류하고 의미를 주고받고 싶다. 누군가 내 글을 본다면 다정하게 말을 걸어줬으면 좋겠다. 따라와 줘 원한다면, 나 외로운 건 싫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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