겜잘러에 치이는 삶
"아이온을 고 3 때 열심히 했었어요! 나중에 아이온 회사에 취직한다고 했는데 정말로 왔네요 하하하"는 사업 PM 인턴 근무 첫날에 '디아나는 게임 좋아해요?'라는 질문에 한 대답이었다. 반은 맞다. 고3시절 안 하던 컴퓨터 게임에 느닷없이 빠져버린 건 진짜였다. 하지만 게임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할 대답은 아니었다. 저런 대답은 게임이 좋아서 게임 회사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니까. 그저 '인턴 전환'이라는 미션을 클리어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발휘한 기지였다. 당시 나는 무지성 공채를 넣다가 전환형 인턴을 하는 중이었고, 이 회사가 그 게임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서류를 넣을 때 알았다. 여하튼 게이머 코스프레와 성실함을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하게도 전형에 최종 합격했다.
그렇게 나는 게임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판교에서 회사를 다닌다는 사실과, 게임이라는 재밌는 콘텐츠를 다룬다는 사실이 나를 들뜨게 했다. 특히 슬리퍼 신고, 반바지 입고 출근해도 되는 IT 특유의 뽕맛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내가 간과한 점이 있다면 게임 회사인 만큼 이곳은 게임에 대해선 뭐든 매운맛이라는 것이었다. 겜알러 수준의 내가 곧 겜잘러들에게 쥐어 버틸 거라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겜잘러에 치이는 이유
- "저 OO 아이템 있습니다"
- "캬 인재야 인재"
라는 대화가 일상처럼 오가는 그곳은 바로 게임 회사. 게임만 잘한다고 일을 할 순 없지만 게임을 잘하면 여러모로 유리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개꿀이잖아?라고 생각할 수는 꿈의 직장. 그러나 평범한 겜알러인 나에게는 넘어야 할 장벽이었다. 특히 나의 첫 회사는 라이크류를 만들어내기도 한 그 게임을 출시했던 곳이라 특유의 게임 감성이 있었는데, 그걸 이해하는 것도 또 하나의 미션이었다. 나의 동료이기도 한 겜잘러들은 뭔가 다른 사람들이었다. 일을 위해 게임 동향을 살피는게 아니라, 그냥 재밌어서 스트리밍 방송을 하루 종일 틀어놓았고, 아침에 와서 피곤하다고 해서 언제 잤냐고 물어보면 보스를 잡는다고 밤새고 왔다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게임 이름으로 문신을 새긴 사람도 있었다. 또 어느 날은 꿀잠자고 아침에 출근했더니 나만 빼고 모두가 분주했다. 쎄해서 물어보면 새벽에 게임 안에 있던 세력끼리 싸웠다나, 고래 유저가 중대 발표를 해서 비상이라는 식이다. '어떻게 새벽 4시에 일어난 분쟁을 모니터링하고 있을까..'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뭐랄까 이런걸 경험하면 '게임을 잘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난 안될 거야'하는 감정이 교차로 몰려온다.
'남들이 나보다 게임 좀 하는 게 뭐가 그리 주눅 들 일이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게임은 24시간 돌아가는 서비스이고 유저들의 성장 수준, 콘텐츠 소비 수준이 매 시간 변하는 특수성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패키지 게임이 아닌 온라인 게임을 서비스하는 입장에서는 유저들의 긍정적인 경험을 위해 마땅히 다음 마일 스톤을 준비해야 한다. 이때 게임을 잘 알면 후속 대응이 아니라 선대응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서비스했던 게임에서 정말 제작하기 어려운 무기가 있었는데, 나의 동료인 겜잘러들은 방송을 보거나 커뮤니티를 보며 누가 어디 단계까지 완료했고 어느 시점에 제작이 완료될 지를 예측했다. 적당한 시점을 보며 미리 축하 메시지나 이벤트를 기획을 하기도 했고, 아이템 출현 후 인게임 밸런스에 대해서도 미리 논의를 하자고 제안했다. 스트리머가 그 대상이라면 조금 쉽겠으나, 은둔 고수 같은 평범한 유저의 얘기라면 게임에 웬만히 깊게 관여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게임 데이터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으나 데이터는 후시 지표적 성격을 가지기에, 게임의 중요한 이슈를 파악하기에는 골든 타임이 지나간 경우가 많다.
또 데이터로는 볼 수 없는 정성적 유저 체감도 결국 플레이 경험에서 나온다. 신규 던전 이용률, 레벨별 던전 성공/실패 횟수 같은 걸로는 알 수 없는 실제 만족감은 게임 경험을 통해 파악하는 게 더 유용하다. 그리고 이런 정성적 자료가 쌓였을 때 한 사람이 콘텐츠에 갖게 되는 인사이트는 무시무시하다. 이 부분에선 모든 업계가 비슷하겠지만, 아이돌이나 애니메이션처럼 몰입도가 높은 콘텐츠의 경우 경험으로 축적한 인사이트는 독보적이다.
황새를 쫓아가 보았는데요
앞서 말했듯 확실히 게임을 잘하는 건 인정 요소이기도 해서, 게임 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겜잘알이 무시하는 게 빡쳐서 신작 게임을 엄청 팠던 적이 있다. 게임을 24시간 켜놓고, 유명 스트리머 방송도 챙겨보고, 게임 내 세력에도 속해 보기도 했다. 과금도 천만 원 가까이했었다. 당시 내가 하던 게임은 다른 세력과 전쟁 중이었는데, 중간중간 적이 나에게 칼을 꽂으면 '쿠구구궁!' 하는 알람이 왔었고, 알람을 들으면 총알같이 게임에 들어가 같이 공격을 하거나 귀환을 하는 식이었다. 캐릭터를 죽여 경험치를 못 먹게 하는 게 전쟁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특히 새벽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당시 평범한 내 친구들은 날 게임 폐인 취급했다. 그럼에도 '일하는 거야'라고 말하며 게임을 계속했다. 게임 론칭 초반 영웅 등급 변신을 얻기 위해 300만 원을 써야 하는 이유를 눈물을 흘리면서 남편에게 설명하기도 했다. '나도 이거 하기 싫어 근데 안 하면 나만 게임 모르는 병신 취급당하는데 어떡해'
여기까지 말하면 짠해 보일 수 있겠지만, 그날의 경험은 나에게 많은 것들을 안겨줬다. 어느 정도 재미있기도 했고, '죽기 싫으면 강해지던지'라는 특유의 감성 탑재에도 성공했다. 또 어느 정도 게임을 할 줄 안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고, 높은 전투력 유저가 생각하는 성장 목표, 과금 감성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오히려 최근에는 이렇게 내가 취했던 게임 경험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고 마음을 먹어야 할 정도다. 어느 업계나 마찬가지겠지만, 내가 일하는 분야의 프로덕트에 디깅 해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다만 지속하기는 힘들었다. 취향의 영역이라는 결론에 다다렀기 때문이다. 이렇게 게임하면서 살 수는 있겠는데 게임 외에 다른 좋아하는 것들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책, 글, 기록 등 내가 생각하던 휴식을 즐기기엔 시간이 모잘랐다. 휴일에 게임을 하는데도 일하는 것 같았다. 물론 겜잘러들도 마냥 놀면서 게임하는 건 절대 아니다. 내가 존경하는 그들도 업무 전문성을 위해 기꺼이 게임에 시간을 쓴다. 다만 나에겐 그게 다른 취미 생활을 포기해야만 하는 고난과 같은 일이고, 겜잘러에겐 나만큼 어렵지 않을 뿐이다. 업계인으로서 프로덕트를 공부하고 취하는 건 분명 중요하나, 덕업일치하는 사람들을 따라가봤자 내가 그들과 같아질 순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간단히 생각해봐도 십여 년을 매일 게임에 투자한 사람과, 잠깐 바짝 한 내가 같을 순 없기도 하다. 그래도 당시 유일무이했던 특이한 게임을 알아갔던 경험은 내게 큰 자산이 되었다. 론칭 당시 천만 원을 들였던 그 캐릭터는 중간에 게임을 접었기 때문에 현재 무과금과 다름없는 수준이 되었다. 자산을 얻은 것 치고는 꽤 비싼 교육비를 치른 셈이다.
뱁새의 길로 간다
나는 시간이 생기면 '새로운 게임이나 해볼까?'보다는 '새로운 책이나 읽을까?'가 먼저인 편이다. 그래서 솔직히 7년차가 된 지금도 스스로가 게임 업계에 안 맞는 거 아닌가 생각을 한다. (이럴 거면 더 빨리 업계를 떴어야 했는데 늦었다) 그렇게 황새 따라갔던 뱁새는, 이후 뱁새의 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에 조금 더 집중한다는 뜻이다.
당시 유망주였던 내가(지금은 노망주지만) 유일하게 개선점으로 들은 내용들이 늘 게임이었기 때문에 게임을 팠던 거였다. 게임만 잘하면 다 씹어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이 바뀌게 된 이유는 각자의 강점에 집중하고 서로의 강점에 기대며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팀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 겜잘러는 아니지만 다른 것들을 잘하는 리더가 조직을 잘 이끄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꽤 오랜 시간 '게임을 잘하는 것'이 PM의 가장 높은 조건이라고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했었는데, 다른 멋진 사람들을 보며 용기가 생겼다. 일의 목표는 내가 뛰어한 존재가 되어 일당백을 해내는 게 아니라, 팀원들과 어찌어찌해서 결국 좋은 게임을 만들어 나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겜잘러인 실무자분의 인사이트를 귀담아 듣고, 겜알러인 내가 잘하는 분석이나 전략 방향, 일감 관리 같은 것들을 버무려 서비스를 잘 이끌어 나가면 그뿐이다. 그 방향이 나에게도, 조직에게도 더 이롭다고 생각한다. 게임을 잘하는 게 황새고, 나머지가 뱁새가 아니다. 내가 잘하는 것 외 다른 것들을 무분별하게 따라가는 게 황새를 따라가는 행동이다. 나의 약점을 보완하는 것은 개인에게 큰 보탬이 되지만, 유일한 정답이 되지는 않는다.
이전에 쓴 글처럼 나의 역할은 정돈자라 생각하기에, PM으로서 불분명한 시장 요소를 정돈하기 위해 다양한 게임을 접하려고 노력 중이다. 이는 겜잘러가 될 수 없는 내가 뱁새로서 약점을 보완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고, 스피노자의 말처럼 깊게 파기 위해 넓게 파기 시작한 셈이기도 하다. 동료의 인사이트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데이터를 보며 다른 의미의 경험을 축적해 나가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나는 내가 잘 하는 걸 앞으로도 잘 해내고 싶다. 황새의 날개짓에 흔들리지 않고, 나만의 길을 가는 귀여운 뱁새가 되고 싶다. 뱁새는 귀여우니까 그 길로 가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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