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테스트
어제는 새벽 세시가 넘어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결전의 날. 여자는 여러가지 이유로 생리를 하지 않으면 불안해 한다. 생리를 하지 않을까봐. 사실 3주 전에 생리를 했다. 여자는 호르몬에 따라서 양이나 주기가 자주 변하는 편이다. 이번 달 나는 작은 편이었다. 최근 주변 환경이 급격하게 바뀌기도 했고, 이번에 작은 대신 다음 달에 많이 나올거라 생각하고 넘겼다. 그런데 일주일 뒤에 다시 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생리라고 하기엔 작은 양, 하지만 계속 흘러 나오는 이물. 불안한 마음에 남자친구에 털어놓았다. 착상혈이면 어떡하냐고. 남자친구는 이 단어를 처음 들어본 것 같았다. 네이버에 검색을 하더니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 아무 일 없을거야.
/ 아무 일 없어야 해. 난 지금 준비가 안되었어.
/ 많이 걱정되면 혈액 검사를 해볼까?
/ 아니야.. 오빤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혈액 검사는 지금 결과가 안나와
/ ...
분명 사랑은 둘이서 이뤘는데, 걱정의 비중은 왜 내가 더 큰 것 같을까. 물론 남자친구도 걱정하겠지. 근데 약간 억울한 감정이 드는 건 왜일까?
/ 생리를 할 때 임신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대.
/ 응 나도 알고 있어, 근데 그냥 걱정되서 그래. 임신을 안해봤는데 착상혈이 뭔지나 알아야지. 그러니까 걱정되는거야
/ 아무 일 없을거야.
/ 미처 생리 때 못나온 피가 이제 나오는 걸 수도 있지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시기 상으로는 테스트기로 임신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날. 착상 후 2~3주. 어제 저녁에는 남자친구를 끌어안고 잤다. 잊고 있다 문득 생각이 나서 마음이 혼란해졌다. 남자친구의 토닥임을 받으며 잠이 들었고, 아마 그는 내가 잠들 때 까지 머리를 쓰다듬어 줬을 것이다.
생각했다. 아기를 갖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아기를 낳은 여러 언니들이 생각났다. 이른 나이에 아기를 낳은 어떤 언니는 행복과 좌절을 하루마다 반복했다. 측은해보이고 불안정해보였다. 독박육아와 육퇴, 현실, 차별, 여성이라는 단어가 인스타그램에 너무 많았다. 출산과 육아는 여성으로서의 사회 생활이 끝나는 것 처럼 보였다. 역시 아기는 낳는게 아닌 것 같아. 그러다 최근에, 태어난 지 100일 안된 갓난아이를 볼 경험이 있었다. 아기의 부모와 가족들은 행복해 어쩔 줄 몰라했다. 그들은 사랑스러운 눈으로 자기 몸도 못 가누는 아기의 비위를 맞추고 싶어했다. 바깥의 위협으로부터 아기를 지키고 싶어했다. 솔직히 아기를 키우는 게 또 다른 행복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녹록치 못한 현실에서 산다면 그냥 모르고 살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배우지 않은 모성애보다는 내 삶이 더 소중하니까. 그 생각은 근 10년간 변함이 없었는데, 가족의 순간을 목격한 후에 생각의 제동장치가 걸려버렸다. 과연 아기를 갖는다는 건 어떤걸까?
/ 내가 만약 아가를 가지면, 누구를 닮을까?
/ 나는 자기를 닮은 예쁜 딸이 나왔으면 좋겠어.
/ 나도 오빠보다는 날 닮은 딸이 좋을 것 같아. 특히 콧구멍은 오빠 닮지 않았음 좋겠어
/ ㅎㅎㅎ
/ 성격은 오빠 닮아서 순했음 좋겠다. 키우기 편하게
임신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는 걸 알기에, 남자친구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는다. 대화를 끝낸 후,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투명하게 닮은 제 3의 인격체를 상상해본다. 내 새끼손톱보다 작은 손가락을 만져보는 생각을 한다. 그 아이는 잘 우는 아이일까, 예쁘게 생겼을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어떤 것에 흥미를 느끼고 무엇에 분노할까, 사주가 좋을까. 사실 아이의 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을 허공에 던질 뿐. 다만 우리의 아이를 아끼고 사랑할 내 남자친구의 모습은 그려진다. 그 이의 꿀 떨어지는 눈빛, 아이를 처음 안을 땐 눈동자가 흔들리겠지, 내가 힘들다고 하면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줄 것이다. 아마 스스로를 가장이라 여기며 더 늠름해 질지도 모른다. 매일 아기가 보고 싶어 일찍 퇴근을 할 게 뻔하다.
그는 사실 결혼 후에 아이를 가지고 싶어한다. 하지만 나에게 강요하지 않고 싶다고 했다. 나중에 결혼 후 충분히 대화를 하고, 시기 상으로 둘 다 원한다고 느낄 때 아이를 갖자고 했다. 다만 내게 난 안가질건데? 하며 마음을 닫아놓지만 말자고 부탁했다. 결혼을 조건으로 무기삼지 말자고 했다. 난 사실 손해보는게 너무 싫고, 잃을 것이 많을까 두렵다. 경제적인 상황들도 염려된다. 우리 둘다 집안이 넉넉하지 못하니까 집 한 채 살 때도 안 보태 줄 거다. 나는 승진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머리카락은 빠지고 내 몸은 낡아질 것이다. 그런 두려움에 오기로 애기를 안낳고 싶다는 얘기를 한 적도 있다. 나의 의지가 최전방 방어선이고, 이 것이 무너진다면 출산은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될테니까.
아기에 대한 환상을 가지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무엇보다 결혼 전인 지금 아이를 가지는 건 너무 위험하다. 웨딩드레스도 입어보지 못하고, 신혼 생활도 못즐기고 출산과 육아라니..! 새 팀을 간 지도 얼마 안되었다. 가고 싶은 부서에 겨우 왔는데, 아기를 낳고 오면 다시 좌천될 지도 모른다. 여러가지 이유로 생리가 그리워졌고, 테스트기 시험이 간절해졌다.
늦잠을 잤다. 더 잠을 잘 수도 있었지만, 부랴부랴 일어나 테스트기를 찾아 화장실로 향했다.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방법은 소변을 묻혀 검사하는 방식이다. 혹여 소변이 덜 묻혀졌을까봐, 검사 결과가 잘 못 나올까봐 신중하게 시험했다. 수평을 안맞추면 또 안된다고 해서 후다닥 평평한 곳에 올려 놓았다.
한 줄 이었다.
당분간은 소중한 내 일상이 지켜질 것임에 감사함을 느꼈다. 당분간 돈을 더 모을 수 있고, 모은 돈으로는 명품 가방을 살 수 있다. 팀에선 쫓겨나지 않아도 된다. 커피나 술을 잔뜩 마실 수 있고, 격한 운동도 다이어트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걱정보다 축복으로 아이를 맞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한 숨 돌리며 주섬주섬 주변을 정리하다 테스트기 포장 박스를 발견했다.
유통기한 2020년 7월 21일.
테스트기에도 유통기한이 있는 줄 몰랐다. 2달 지난 테스트기를 사용했는데, 이 결과지를 신뢰할 수 있을까? 방금까지 했던 안도감이 증발하는 순간이다. 한숨을 푹 쉬고, 하는 수 없이 남자친구에게 다시 연락을 했다. 이런 연유로 다시 새로 테스트를 해야할 것 같다고. 오늘 밤에 약국에 가서 사오라고 말이다. 여자는 여러가지 이유로 생리를 하지 않으면 불안해 한다. 생리를 하지 않을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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