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늙지않고 기다려주세요
나이를 먹다보면 '아니 우리 부모님이 이렇게 여렸나?'싶은 순간들을 종종 보게 된다. 어릴 적 동생이랑 싸우기라도 하면 "빗자루 가져와"하면서 훈육하던 엄마가 아직 새록새록한데 말이다. 아빠는 여전히 괄괄하고 힘이 세지만, 얼굴과 손에는 공장 기름으로 30년을 산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드디어 스스로 앞가림을 할 정도로 자랐어요 엄마아빠!"하며 돌아봤을 때 흘러간 시간 만큼 늙어있는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면 놀랍고, 눈물도 난다.
몇 달 전에는 포동포동 살이 쪄서 본가로 내려갔다. 스스로 찔리는 부분은 있는지 머쓱해서 "엄마 왜이리 나는 먹는게 좋을까ㅎㅎ"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보통같으면 그만 좀 먹어라 라고 할법도 한데, 갑자기 엄마는 미안해했다. "엄마가 니 임신했을때 먹고 싶은걸 못먹어가 니가 그리 식탐이 많은갑다, 그때 아빠 월급도 못받아오고 그랬어"하면서. 갑자기..? 식탐이 많다고 살이 쪄오는게 당연한건 아닌데, 엄마 이야기를 듣고 더 머쓱해졌다. 그때가 많이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자리를 고쳐앉으면서 최근에는 무릎이 안좋아서 연골 주사를 맞았다고 했다. 늙어버린 엄마, 그럼에도 못해준 게 기억이 나 미안해하는 엄마를 보니 마음이 이상했다. 말주변이 없어서 그냥 에이하면서 넘겼다.
옛날에 못해준 걸 굳이 끄집어 내 평생 미안해하는 건 전세계 공통 부모특인 것 같다. 시어머님, 시아버님은 결혼할 때 보탬을 많이 못주신 것에 대해 미안해하셨다. 1원도 안보태주신 것도 아니고, 양가 부모님 똑같은 금액으로 도움을 주셨는데도 미안해하셨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집 정도를 해주고 싶으신거다. 물론 나도 우리집이나 시댁이 부자였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지만, 이건 내 생각인거지 실제 부모님들이 그렇게 생각하길 바라지는 않았다. 그저 잘 키운 자식들을 뿌듯해하고, 행복한 노후를 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당신들의 마음은 그게 아닌가보다. '이번에 무리하다 보니 앞으로는 많이 못드릴 것 같아 이번에 좀 넣었어요', '엄마 이제 화장실만 내꺼야', '엄마가 몰라서 그렇지 여기는 아둥바둥안살면 안된단 말야'하는 말이 당신들에게는 신경쓰이는 말들이었나보다.
노부부는 늙어서도 자식 걱정을 한다. 앞으로 너네가 알아서 살아라, 말은 하면서도 손주를 기다리고 손주를 봐줄 계획을 짠다. 차가 없는 자식을 안쓰럽게 여기고, 다음 아파트로 갈 때는 더 보태주겠다고 돈을 모으신다. 당신들의 노후 준비가 부실하다는 건 마음으로 알고 있음에도 머릿속까지 연결짓지 않는다. 웃긴건 내로남불이라는거다. 나는 자식 걱정을 해도 되지만, 내가 자식 걱정을 시키는건 죄스럽게 여긴다. 부모님들 사이에선 그런 암묵적인 룰같은게 있는가보다. 늙어서 우리가 그러면 안돼, 그러는거 다 자식 고생시키는기라, 욕심부리면 안돼 야야 하면서. 예전에 엄마는 나한테 문득 엄마가 치매 걸리면 절대 보살피지말고 요양원에 보내라고 했다. 엄마도 외할머니가 치매에 걸리면 그렇게 할거라고, 너도 미안해하지말고 그렇게 하라고. 절대 그게 나쁜게 아니라고. 이 정도면 내리사랑은 참 잔인한 사랑이다라고 생각했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내주려고 하는 노부부를 보며,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그러다 당장은 할 수 있는게 없어서 전화를 하기로 했다. 오전 11시, 3초만에 전화를 받은 아빠는 혼자 집에서 TV를 보는 중이었다. 엄마랑 동생은 어디로 갔는지 없고, 밥도 없고, 골프장도 갈 수 없어서 집에 가만히 있는다고 했다. (청승맞게 있다고 외로움을 어필하다니, 언제 이렇게 귀여워진거지?) 올해 전화했으니 내년까지는 전화 안하겠네라는 아빠. 그정도까진 아닌데 전화를 안하긴 무진장 안했나싶어 머쓱했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이사한 집에 놀러가겠다고, 코로나가 끝나면 여행도 가자고, 그리고 종종 연락하자는 말을 하시며 통화를 끊었다. 안하던 전화를 하니 새해에 딴 사람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짧지만 몇 분이라도 자주 연락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멀리 떨어져있는 딸내미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돈 안드는 효도를 한다. 퍼다주는 애정에 비하면 가성비가 안맞는 보답이지만,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으니까 짧게라도 좋은 기억을 남기는 걸 우선 선택하려고 한다. 그리고 소란이 지나면 여행을 가자고, 부모님이랑 등산을 가든 꽃놀이를 가든 좋은 기억을 남기자고 남편과 이야기한다. 자식을 볼 때 미안한 마음보다 고맙고 즐거운 감정을 더 많이 느꼈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내가 잘나서 알아서 잘컸다 생각했으나, 그 뒤에는 늙어버린 엄마와 아빠가 있었다는 것을 올해가 되어서야 알았다. 30년이 지났지만 엄마와 아빠에게 나는 여전히 어리고 철없는 딸이라 자꾸 뭘 주려고하고, 못 준것에 대해 미안해한다. 지금도 엄마가 준 반찬을 받고, 아빠가 사준 꽃게를 맛있게 먹고 있지만 알고있다. 이제 보살핌을 받는 대상은 나에게서 부모님으로 아주 천천히 이동해가고 있다는 것을.
전화도 하고 여행도 갈테니, 좋은 기억을 앞으로도 더 많이 남겨드릴테니, 부디 건강한 모습으로 오래 남아 있어주면 좋겠다.
조금만 늙지않고 기다려주세요. 엄마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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