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경(月经)
이런걸 생리불순이라고 한다. 처음엔 며칠, 일주일 정도 미뤄지더니 이번달은 40일을 훌쩍넘겼다. 여자는 여러가지 이유로 생리를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생리를 하지 않을까봐.
스트레스다. 4학년 2학기에 누구에게나 불어닥친다는 폭풍이 온 이후로 늘 마음이 불안하고 흔들렸다. 정확하지 않은 내 마음을 어떻게든 잡아내고자 토해내듯 내 상황과 이야기를 쏟아냈다. 누구에게 이야길해도 나아지지 않았다. 높은 놀이기구에서 떨어져 내려왔지만 내 마음은 아직 허공에 떠 있었다. 어중간하게 볼품없고 초라했다. 4년의 치열함을 거쳤다 자부했던 나는 대단한 삶의 통찰을 가지지도, 앞으로의 사회로 나갈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그이후 나는 덕지덕지 새 일상을 붙여나갔다. 토익해야지, 청년같이 해야지, 디자인 마무리해야지, 아 토익없어도 공채는 써야하는거구나, 하며 이번 학기도 나는 바쁘다 생각하니 쓴 웃음이 났다. 평소에는 기뻤던 일들이 왜 이번엔 기쁘지 않을걸까.
뭐가 그리 아팠니, 뭐가 그렇게 나를 힘들게 했니. 많은 외로움 속에서, 나는 많이 지쳐했다. 그러나 서울에와서 뼈저리게 느낀 건 우리나라는 더 이상 나아지지 못하겠구나,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서울에 있는동안,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리고 좋은 평가를 받는 실체와 가치관이 내 옆에서 흘러가는 걸 지켜보았다. 어릴때의 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가 하는 작은 일들이 세상의 빛이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서울에서의 나는 한 없이 작은 여대생이었고, 세상은 컸다. 필드메이커가 되겠다는 사람들과 기관은, 결국 스포트라이트를 쫓아다녔고 가치관과 행동사이의 결함을 '현실'이라는 말로 은폐시켰다. 모두가 그럴싸한 가치관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얼굴 앞에 휘장을 둘러쳤다. 언제든지 무엇과도 타협할 수 있도록. 투명하지도 단단하지도 않은 서울의 본질을 보고, 난 패전병처럼 쓸쓸하게 집으로 내려왔다. 이런 시발, 단 한마디도 못하고 찐따처럼 내려왔다.
당분간 부산-울산에서의 찐따같은 생활은 계속되었다. 역설적이게도 내가 헐뜯었던 서울의 본질을, 내 안에 가득 담아왔던거다. 남들이 시키는대로, 현실이라는 모습으로 타협하며 지냈다. 못난 내가 너무 부끄러워 누구든 붙잡고 변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2달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아무것도 이뤄내지도, 행복하게 쉬지도 못했다. 천하의 찐따. 그러던 중 공채전력 10전 9패를 넘어, 마이다스아이티 서류전형에 합격했다. 그리고 같은 직무에 지원한 사람들과 오픈채팅을 열어 정보를 공유했다. 일하는 기계가 되어도 좋으니 합격하고 싶다는 29,30살의 같은 지원자를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난, 나는. 2주일을 손으로 세며 기다리는 내가, 얼마전 목수정의 <월경독서>를 읽었다.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월경. 아이를 만들기 위해 여자의 자궁이 준비해둔 양분이 한 달에 한 번씩 버려지고, 다시, 아무 망설임도 없이 생명을 잉태해내기 위한 담금질을 시작한다. 동시에 내 뜨거운 가슴 안에서 잉태할 수 있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제대로 된 기차를 탄 건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닌지, 두리번거릴 여유를 세상은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최대한, 전속력으로, 가능하면 최연소에 뭔가를 달성하려고 달린다. 그렇게 헐떡거리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현대인의 삶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다 보니 우리는 왜 이 길에 들어섰는지를, 이미 열차가 들어선 다음에야 고민하기 시작한다.
시대가 사람을 어떻게 일그러뜨려도, 인간은 자신만의 무기로 스스로의 향기와 존엄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
나는 본다. 시골 기차역 대합실의 긴 나무의자 위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 한 걸인 여자를. 그녀는 파리 떼가 얼굴에 들러붙는 것도 모르고 참 잘도 잔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깊은 잠에 흠뻑 취해 잘 수 있을까? 그녀의 신발은 해어지고, 그녀가 입은 치마의 아랫단은 닳아졌다. 또 그녀의 윗옷 팔꿈치는 별빛이 드나든 것처럼 송송 구멍이 뚫려져 있다. 참 마음 편히도 자는구나. 나는 한참동안, 그 여자 ㄱ지의 누워 자는 모습을 구경했다. 그러던 어느 사이, 자는 사람 구경을 하다가 나 또한 잠 속에 빠져들었고, 그 깊은 잠 속에서 꿈을 꾸게 되었는데, 정확히 말해, 그것이 내가 꾼 꿈인지 아니면 내가 구경했던 그 걸인 여자가 꾼 꿈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그 꿈은 그녀와 내가 함께 꾼 꿈, 그러니까, 우리들 모두가 한 번씩은 꾼, 그런꿈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 그녀와 함께 세상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중에, 갑자기 꿈이 깨었다. 역의 관리인이 와서, 앉아 졸고 있던 내 이마를 그의 호루라기로 툭툭 쳤던 것이다. 시계를 보니, 12시 5분. 개찰구 밖에는 내가 타야 할 기차가 서 있었다. 나는 표도 없이 개찰구를 향해 내달렸다. '나는 저 기차를 타고, 긴, 아주 긴, 여행을 할거야!'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되어, 표정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관리인이 아무리 흔들어도, 그 걸인 여자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녀야말로, 천국도 지옥도 없는 아주 긴 여행 속으로 떠난 것이다. _ <긴여행> 장정일
아, 알았다. 난 어딘가 나를 보고 있을 서울이 '넌 뒤쳐졌구나'하는 비웃음이 두려웠었다. 그럼에도 내 안에는 어느 하나의 확신도 없었던 거였다. 마음은 허공을 맴돌고 눈은 땅 밑을 향했던. <사랑이 모든 것을 구원한다>며, 책을 읽으며 조용히 나를 달랬다. 그리고 필기시험을 치기위해 예매했던 기차표를 취소했다. 그 날 저녁, 드디어 생리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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