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서울은 하루종일 맑음
오늘 서울은 하루종일 맑음(Skies will be fair in seoul)
다른 날 같았으면 이미 쓰고도 남았을테지만, 이번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어떻게 글을 시작해야 할 지,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얼마전에 샀던 <결혼전에 물어야 할 한가지>라는 책 머릿글에서 자신의 배우자의 눈을 의식해서 결혼에 관한 글을 쓰기 어려워 집필을 거부했다던 내용이 생각났다. 사실 무엇보다 보여지는 게 많이 신경쓰였다. 그래도 뭐 결국 노트북을 열고 키보드를 잡았다.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라고(!)
얼마전에 연애를 끝냈다. 한 달전 쯤이었다. 10월의 연애를 끝나고 나서 든 생각은 '아무나 만나지 말자'였다. 물론 시간을 같이 보냈던 그 사람이 '아무나'였다는 건 아니었지만 좋아해준다는 감정만으로 사람을 쉽게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한 오빠와 커피를 마시면서 "진짜 그 사람이 날 많이 좋아해줬고 나도 그랬던 것 같은데, 헤어질 땐 진짜 미련하나 안남았어요, 내가 별로 안좋아했나봐요"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오빠는 "아냐, 너도 좋아했겠지. 사람들이 왜 미련이 생기는 줄 알아? 상대방을 좋아하는 것보다 이전에 받았던 것들을 다시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인거라고. (...) 공감대가 없었네, 같이 만나면서 공감할 수 있는게 없어서 쉽게 헤어질 수 있었던거네"라고 이야기했다. 원래 뾰족한 사람이었지만 이정도일줄이야,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인정했다. 맞는 말이었다. 같이 있을 땐 몰랐는데 멀리 떨어져 연락하다보니 '이야기가 잘 안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이야기를 주고 받지 못하는 느낌. 내 생각을 '그래 맞다'하고 끝내버리는 대화에 좀 신경질이 나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유치하지만 내 생각을 뺏어가는 느낌이기도 했고, 왜 맞다 안맞다하고 평가하지? 하는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아니 그럼 내가 어떻게 해줘야하는데?"는 말다툼의 요지였다. 사실, 이 이야기가 나온 순간부터 접었어야 했다. 그렇게 싸움을 하는 1달의 시간을 더 끌어 지난 10월, 연애의 종지부를 찍었다. 친구들은 '그래, 원래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지지'라고 이야기했다. 연애의 8할이 장거리였던 나는 절대 동감할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딱히 반박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했었다. 그래서 오빠의 말을 듣고 무릎을 쳤던 것 같다. 아, 그렇구나. 구연애 히스토리가 조금 길었는데, 여튼 아무나 만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첫번째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정말 구석구석 살펴봐야지, 시간을 두고 많이 이야기 해봐야지, 그리고 그땐 잘 만나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을 한 게 2주 전인데- 머쓱하게도 2주만에 나는 지금 한 손에 돋보기를 쥐고 있다.
지난주, 서울을 다녀왔다. 일 말고, 진짜 서울 여행을 다녀오고 싶기도 했고 한달 전 연락했던 오빠를 보러 갈 예정이었다. 뜻밖의 금요 휴무를 받은 오빠를 데리고 청계천으로 갔다. 평일이라 사람이 많이 없을 줄 알았는데, 서울이라 그런지 북적거렸다. 다리 위에는 여러 주전부리를 팔고 있었다. 사실 솜사탕을 먹고 싶긴 했는데, 귀여운 척하는 걸로 보일 것 같아 참았다. 근데 솜사탕 쳐다보는 걸 오빠가 봤는지, "솜사탕 좋아해?"하고 물었다. 아아아니라고, 손사래치고 빠져나왔다. 등불축제를 보고, 종각을 걷고 밥을 먹고 술도 한잔 마시고, 그렇게 온 하루를 꽉 채웠다. 내일 쉰다는 사실에 행복해하며 일찍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가는 사람들을 보며 오빤 '으이그 직장인들'하며 뿌듯해 했다. 그 모습이 너무 웃겼다. 그래봤자 겨우 하루 쉬는 직장인이면서.
작년쯤, 딱 한 번 만나고 친구한테 달려가 많이 조잘거렸던 것 같다. 이렇고 저렇고 그래서 이렇게 했다니까? 이야기를 듣던 친구는 웃으면서 "왜 자꾸 그 사람 이야기만 해, 수상한데~"하고 얘기했다. 당시에 친구는 그냥 던졌던 말이였는데 나 혼자서만 당황했다. 혼자서 어버버하다가 '아 지금은 별 생각 없는데 그 때 날씨가 좋아서 잠깐 좋았던 기분이 들었나봐!' 하고 어물쩍 넘어갔다. 그 이후로 그 오빤 내 친구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날씨가 좋은 오빠>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날씨가 좋은 오빠가 그 날 '으이그' 하며 내일의 휴일에 행복해 하고 있었다. 뭐 자주는 아니지만 크리스마스며 생일마다 꾸준히 연락하며 지냈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그냥 좋은 오빠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날 저녁 날씨가 맑았는지, 그날의 공기는 조금 바뀌어있었다. 토요일엔 북촌을 한바퀴 돌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손을 잡고 여기저기 둘러봤다. 그리고 아쉬움을 가득 담은 눈을 보이고 기차에 올라탔다. 우리는 유리창에 글자를 쓰는 쌍팔년도 영상을 생각하며 히히덕 거리면서 출발하기 전까지 창을 하나 두고 계속 이야기했다. (물론 카톡으로) 부산에 도착해 집에 가기 전까지, 그리고 자기전까지도 계속 메세지를 주고 받았다.
메세지를 주고 받고, 서울에 있는 동안 서로의 마음도 주고 받았다. 그리고 돌아왔다. 다음주면 학교를 가야하는 나와 출근을 해야하는 그 사람의 일상으로.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해두어야겠지'라는 이야기로 시작된 우리의 이야기는 현실적이었다. 졸업을 하고 취업준비를 해야 하는 나와, 떨어져있는 거리, 감정의 소모에 대해서. 힘들 것 같다는 의미가 담긴 메세지. 카톡을 보면서 나혼자 풀이 죽었다. 사실, 지금은 좀 힘들지만 나중에 내가 올라가게 되고 그때도 서로 좋은 감정이라면 그 때 다시 생각해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근데 그마저도 그 사람이 '기다릴게'라고만 말할 수도 없는 거였다. 시간은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거니까. 다음날까지 이어진 메세지에 '알겠다'는 의미의 답장을 보냈다. (사실 5월에도 비슷한 기류가 있었는데, 이후에 내가 연애를 해서 할 말이 없었다.) 일단 지금 서로가 결정을 내릴 수 있는게 없으니까, 제일 할 수 있는 건 일단 나중이 되어야는거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후, 현재는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주고 받으며 계속 연락하고 있다. 어떠한 관계로 규정하진 않지만 서로의 마음을 잘 아는, 그런 상황.
이런 상황에서 사실 나는 행복해하며 하루하루를 잘 보내고 있다.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직관적인 내 연애론에서는 조금 이가 맞지 않는 이야기 일 수 있다. 그럼에도 서로 마음의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 가까이서, 많은 이야기를 해보기도 전에 어정쩡한 상황에서 만나기엔 좀 아깝달까나, 좀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상황이 정말 맞다면, 그 때 제대로 만나고 싶다는 생각. 불안정한 상황에서 만났다 제대로 만나지도 못한채 헤어지기엔 그 사람이 나한텐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번째 이유는 표현 하나하나 였다. 힘들 것 같다는 메세지를 보내면서도 지금처럼 잘 지내지 못할 것 같아 속상하다는 이야기나 좋아해 하는 표정같은 것들. 사실 저거 되게 나쁜 표현인거 나도 잘 안다. "난 널 거절할거지만 넌 날 계속 좋아해서 이런 썸을 타줄래?"라는 말이랑 같은 의미니까. 근데 막상 저 말을 들을 땐, 그런 생각이 안들었다. 난 '여전히 널 좋아해!'라는 의미로 해석했지만, 실제로 그 뜻이 아니라면 지금 콩깍지가 껴 사리분별을 못해 이런 긴 글을 쓰고 있는 걸 수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은 위에서 말했듯 정말 좋은 사람인지, 구석구석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때문이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동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인지. 이유야 어떻든 그래서 지금 난 어정쩡하면서도 합법적인 썸을 타고 있다. 몇몇 친구들을 만나면서 작년 이야기를 꺼냈더니 모두다 날씨가 좋은 오빠를 기억했었다. 아, 내가 이렇게 팔푼이였다니.
직장인이 되면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가 없다. 무엇하나 배우려 해도 일을 하고 남은 시간에 무언가를 배워야한다. 이런 탓에 지난 상반기에는 취미를 즐길 시간이 없어 너무 억울했었다. 대학교 마지막 시험이 끝나면 좀 더 배울 수 있는 걸 더 배우고자 한다. 자격증도 따고, 이력서도 넣을거지만 배우고 싶었던 중국어도 배우고, 책도 좀 더 읽을거다. 시간을 길게 두진 않고, 잘게 쪼개되 한병철씨의 <시간의 향기>에서 처럼 사색을 곁들인 시간을 보내며 내 인생의 마지막 배움과 취업 준비의 균형을 맞추고자 한다. 조바심은 나지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하는 건 나도 아니까, 좋아하는 사람 하나 보겠다고 무작정 올라가진 않겠지만, 내가 올라가는 그 날의 서울의 날씨는 맑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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