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여행자의 하루(A day of Cosmo-Rider)
박민규 작가 <카스테라>를 필사를 엮은 수필입니다. -2015. 08. 15
'좋은 책 추천해주세요'라고 했더니 책 두 권을 보내줬다. 그것도 벌써 일년 전, 하나는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이었고 다른 한 권은 박민규 소설 <카스테라>였다. 지적 허영심이 하늘을 찔렀던 나는 주저 않고 운명을 꺼내들었다. 죽음의 수용소같은 느낌, 그리고 100페이지도 읽지않고 그대로 덮어버렸다. 일년이 지났다. 그리고 사흘 전부터 나는 카스테라를 읽고 있다.
지구를 떠나보지 않으면, 우리가 지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제임스 라벨-
그러니까- 오늘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코스모를 여행하는 우주인의 하루를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책의 한 구절을 읽으면서 이 글을 안쓰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써야겠다,가 아니었다.) '떠난다'라는 것은 존재의 소실을 의미한다. 어느 책 제목처럼 무작정 나를 알기 위해 떠나는 여행과는 내용이 다르다. 주변을 정리하고 작별 인사를 하고 새로운 곳으로 뛰어든다. 그 새로움이란 비단 만화 영화나 SNS 명언같은 이상적이고 활기찬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한마디로 외롭다. 떠남은 키우던 고양이와 헤어지는 것, 어제까지 마시던 친구와의 치맥과 헤어지는 것, 집에 좀 더 빨리갈 수 있는 지름길과 헤어지는 것, 내 마음에 쏙 들게 앞머리를 자르는 미용실과 헤어지는 것이다. 하나하나 질을 냈던 내 모든 일상과 헤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떠나는 이유는 아마 '그저 그렇기'때문일거다. 나쁘지 않지만 더 이상 나쁘지만 않아서, 다행히 그리고 불행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그래서 떠나는 걸 거다. 외로움과 존재의 소실에도 불구하고, 몇몇 조물주들은 과감히 지구를 떠난다.
성인이 된 인간은 반드시 지구를 나갔다 와야 한다- 앙코르와트와 같은 나라에서 그것은 보편적인 상식이었다고 합니다. 나이의 기준이란 별 의미가 없겠지만 스무 살은 확실히, 세계에 대해 냉담해질 나이니까요. 군대라도 다녀오듯 지구를 떠나, 지구를 보고, 느끼고 돌아오는 앙코르와트의 젊은이들을 나는 떠올렸다. 생각만 해도 근사한 광경이었다. 그런 나라가 왜 멸망한 걸까. 그런 나라가 왜 멸망한 겁니까? 듀란이 물었다. 멸망이라뇨? 단지 그들은 지구를 떠났을 뿐입니다. 아담이 대답했다.
근사한 조물주는 아니지만, 본의아니게 몇 년 동안 많은 유랑을 하고 있었다. 경부선을 따라 부산에서 울산, 대구- 서울. 그리고 또 다른 곳. 여기서 나는 영어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조깅을 한다. 냉장고가 비면 장을 보고, 영화를 보고, 드라이브를 한다. 우주를 여행하는 우주여행자- 호기로운 우주인의 취미생활은 간간이 별을 모으는 일이다. 올 7월 이후로 16개의 별을 모았고 앞으로 14개의 별이 남아있다. 커피를 사고 별 하나를 받는다. 스타벅스의 노예- 어떻게든 골드까지 가보겠다고 열심히 커피를 사마시고 있다. 그렇게 지내고 있다. 별을 모으면서 우주를 여행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저 그랬던 지구를 떠나 그저 그런 우주를 여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소녀가 명랑하지 않듯, 모든 유랑이 새롭고 역동적일 순 없다. 매 순간마다 짜릿한 모험이 가득하다면 아마 누구든 신경쇠약이 걸리지 않았을까. 이런 유랑도 있는거다, 지금 내 유랑은 별을 모으는 것 뿐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조깅을 했다. 한량같은 유랑이라지만 7월 처럼 8월을 보내기 싫어 마음을 더 굳게 먹었다. 5코스로 나누어 뛰던 하프를 3코스로 줄여 부지런히 뛰었다. 몸이 가벼웠다. 왠일로 별로 힘들지 않았다. 누가 서울 근교 아니랄까봐, 달리는 내내 풀벌레 소리가 베어 났다. 풀벌레 소리, 그리고 귀뚜라미 소리-가 절정일 타이밍에 혁오 <위잉위잉>이 간주를 마치고 들어왔다. '비틀비틀 걸어가는 나의 다리 오늘도 의미없는 또 하루가 흘러가죠' 가벼웠던 내 몸이 이내 떠올랐다. 달리는 내내 우주를 떠다녔다. 부지런히 뛰어 8키로를 43분에 끊었다. 원래 우주에 있는 동안은 시간이 빨리 간다. 인터스텔라(Interstellar)에서도 그랬다. 남양주와 스타벅스 사이에 내가 있다.
실업자가 된 빈스는 그후 미국의 중서부를 유랑했다. 유랑이란 결국 강을 따라 흐르는 것이기도 해서, 빈스는 미시시피의 작은 지류가 되어 멤피스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블루스를 배웠다. 블루스는 빈스를 위한 음악이었다. 그는 불과 하룻밤 사이 한 장의 앨범을 녹음했고, 그 앨범에는 훗날 불멸의 고전이 될 세 개의 명곡이 들어 있었다.
모든 소녀가 명랑하지 않고, 매 순간이 액션 영화가 아니듯, 유랑은 강줄기를 따라 이내 끝을 맺는다. 그리고 가장 안정적이라 생각하는 그 곳에서, 다시 조물주가 되어 모든 장면에 질을 내기 시작한다. 낯선 것을 익숙한 것으로 손이 더 잘가는 곳으로. 좋아하는 색으로. 그리고 나면 그 곳은 새로운 지구가 된다. 혹 지구로 되돌아간다 하더라도 이미 많은 것이 변했기 때문에 새로운 지구를 만드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제임스 라벨의 말처럼 지구를 떠나 세계의 정체를 알고나면 지구의 본질을 더 잘 알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서울 라이프와 인턴 생활은 내 안의 소중한 것들을 좀 더 정확하게 해줄 수 있는 좋은 유랑이었다. 비록 외롭고 완벽한 답을 보지 못했지만. 그치만 뭐, 나뿐이랴.
아무도 구원되지 않았어요. 저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저 외로운 사람들은 모두 어디서 살까요? - 비틀즈 <엘리너 릭비>-
유랑이 끝을 맺었다해도 조물주들의 우주여행은 멈출 수 없다. 왜냐면 지금 지구는 그저 그런 곳이니까.
이를 닦고 나온 후, 나는 사전을 펼쳐 <뉴스>의 의미를 찾아보았다. 뉴스(news) [명사] 새로운 일이나 아직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일, 또는 그 소식. 나는 사전을 덮었다. 이제 지구엔 뉴스가 없어요. 지구를 세바퀴 반 돌고, 저녁을 먹으러 돌아온 <각>이 색동 날개를 접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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