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놀이가 필요해
할 건 있는데 움직이기는 귀찮았던 일요일이었다. 동글이가 짜장면을 먹자고해도 내키지 않고 게임도 지루하기만 했다. 기분 전환을 하려고 청소를하고 환기를 했는데도 무료함이 가시길 않았다. 그렇게 오후 다섯시쯤 되었을 때, 나를 배려하는 동글이를 따라 산책에 나섰다.
-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 "없어"
- "커피들고 죽전까지 갔다올까?"
- "응 좋아"
- "창문은 닫을까? 아니면 열어놓을까?"
- "열어놓자, 환기 했는데"
짤막하게 대답하고, 동글이가 사준 수박 주스를 쭉쭉 빨면서 정평천을 걸었다. 처음엔 바람이 불더니, 점점 습한 기운이 올라왔다. 게다가 깨끗한 물에만 산다고하는 그 티끌만한 벌레 떼들. 얘네는 날거면 훨씬 위로 올라가거나 아예 아래로 내려갈 것이지, 왜 사람 얼굴이 있는 그 높이에 뭉쳐있어서 짜증을 더 돋구는걸까? "더워, 습해, 벌레야" 투정을 부리면서 걸었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90%였지만 나를 위해 손을 잡고 걸어주는 동글이의 배려도 알기에 일단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봤자 20분 뒤에 다시 "그냥 돌아가자"라고 말하긴 했지만.
모두에게 그런 날이 있지 않나? 무료하고 처지는 주말. 주말을 이렇게 흘려보내기는 싫어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지만, 결국 방도가 없던 날. 오늘은 딱 그런 일요일이었다. 이 찜찜하고 탐탁치못한 기분을 동글이에게 뱉으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토독 토독, 토독 토독
오늘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긴 했었다. 다만 아침에 비가 안와서 '기상청이 그렇지 뭐'하고 넘겼던 건데.. 문제는 떨어지는 방울이 무거웠다는 점이다. 크고 무거운 빗방울들이 점점 빠르게 내리기 시작할 때의 그 두려움을 혹시 아는지? 토독.토독.토도도도도독. 사실 비 좀 맞아도 집에 가서 씻으면 되긴하다. 아니면 카페에서 비를 피하고 돌아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내 불안의 원천은 고작 비 맞는게 아니라, 찌뿌둥한 마음을 바꾸고자 집 안의 온갖 창문을 열어놓고 나온 것에 있었다. 하. 동글이와 나는 서둘러 버스 정류장으로 뛰었다. 이미 많이 걸어왔기에 버스를 타고 가야만했다. 추적거리는 비를 맞으면서 내 행동들을 후회했다. 동글이의 배려고 뭐고 그냥 아까 내 마음대로 일찍 집에 가자고 할걸, 아니 그 전에 내가 창문을 그냥 닫고 가자고 할걸, 아니 그냥 나오질 말걸. 이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비는 주르륵 내리더니 갑자기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쓰고도 잘 안나가게 되는 폭포같은 비, 딱 그런 비. 바람이 불어 비가 사선으로 내리기 시작하자 머리가 하얘졌다. 우리 앞 자리에 앉은 아주머니는 비가 많이 오니 우산을 들고 오라는 전화를 했다. '누구는 지금 집 안이 온통 물바다가 되게 생겼는데 고작 비 맞는게 문제냐!!' 한숨을 쉬는 나를 본 동글이는 오히려 내가 일찍 오자고 해서 더 다행이라고, 잘했다고 했다. 하. 그 전에 더 빨리 오자고 할걸.
- 끼익
- "와"
- "그냥 맞고 가야해 뛰자!!"
정류장에 내렸다. 평소 같았으면 정류장에서 멍이라도 때릴텐데 우리에겐 시간이 없었다. 물바다가 되기 직전의 집을 구해야 하는 미션이 있으니까. 아니 물청소 전에 에어컨이나 로봇청소기나 침대나, 구조해야 할 대상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아파트 앞 횡단보도까지 뛰었다. 버스 안에서 나무가 많은 정류장으로 내릴까하고 고민했던게 무색할 정도로 무거운 빗방울들이 한순간에 우리를 덮쳤다. 횡단보도 신호등이 바뀌기 전까지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비를 맞았다. 버스 내리기 전만해도 서둘러 집에 가야한다는 강박이 있었는데, 말도 안되는 비를 한바가지 맞고 있으니 그냥 웃음이 났다. 이렇게 내리는 비에 집에 달려가봤자 무슨 소용인가. 우선 일단 비가 너무 내려서 눈을 뜰수가 없는데 뛸 수라도 있는건가. 주머니도 없는 옷에 겨드랑이에 낀 내 핸드폰은 안전한가. 비를 계속 맞으니 춥군 등등. 감당 안되는 사건 앞에 내가 한 고민들과 후회가 얼마나 무력하고 어이가 없었는지. 너무 웃겼다. 당장 비 앞에 눈을 뜰수 없고 핸드폰을 지켜야 하고 감기에 걸리지 말아야 할 내 코가 석자인데, 뭘 그리 신경질적으로 걱정을 하고 이렇게 할걸 저렇게 할걸 후회를 했냔 말이지.
- "나롱! 여긴 워터파크야!"
- "ㅋㅋㅋ 진짜 워터파크야"
- "응ㅋㅋㅋ 지금 우리는 해골 바가지에서 물을 맞고 있는거야!!!"
나를 달래려고 한 말이었는지, 정말 그렇게 생각을 했는지 동글이가 말했다. 그러고보니 이 기분 워터파크에서 물바가지를 맞을 때 느낀 적이 있는 것 같다. 어이없지만 우리는 대재앙 코로나 시대 때 자연의 워터파크를 즐기는 중이었다. 이렇게 워터파크라 생각하자며 웃기는 동글이가 너무 귀여워서, 우리 상황이 너무 웃겨서 깔깔 웃으면서 총총 걸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물장난을 한 지가 언제였던가. 당분간 없을 물놀이를 즐겼다 생각하면서 돌아오니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엘리베이터에서는 작전을 짰다. 동글이가 먼저 들어가면서 수건을 던지면 나는 서둘러 수건을 몸을 닦고, 그 사이에 동글이가 문을 샤샥 닫는 것으로.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일사천리로 문을 닫았다.
예상대로 집 안은 물바다였고 에어컨 뒤, 베란다, 이불이 젖어있었다. 근데 물벼락을 맞고 와서인지 그냥 너무 웃기다는 생각만 들었다. 둘이서 옷을 벗고 같이 샤워를 했다. 서로의 몸에서 나는 물냄새에 코를 찡그리면서 서로 머리를 감겨주고 바디워시를 묻혔다. 시원한 물벼락 후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니 정신이 맑아졌다. 집안 정리가 결코 손쉬운 건 아니었지만, 비를 맞기 전의 염려보단 덜했다. 개운한 마음으로 우리는 동글이가 먹고싶다고 했던 짜장면을 시켜먹었다. 동글이는 아저씨처럼 짬뽕 국물에 소주 1병까지 클리어했다.
아둥바둥, 텐션을 올리고 주말을 낭비하지 않도록 움직이는 건 유의미하긴 하지만, 유일한 방법은 아닐지 모른다. 자잘한 버그 픽스도 중요하지만 어쩔때는 초기화도 필요하다. 자잘한 걱정들을 폭파시키는 리셋 버튼 같은거. 나는 그게 오늘의 물폭탄이었다.
지금도 비가 내리고 있다. 몇 시간 전까지 문제아같던 비는 이제 동글이의 소주 감성을 돋우는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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