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그릇을 비울 수 있다면
마음의 그릇에 대해 생각해본다. 여기서 말하는 그릇이란 사람의 됨됨이나 능력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 평온한 상태로 어떤 극에 달하지 않는 마음가짐의 총량을 이야기한다.
어느날 친구 젤리가 할 말이 있다며 나를 불렀다. 생소한 직무 이름이 있어 학교 선배에게 물었더니 '너는 거기 서류 광탈이야'라는 이야기를 듣고 우울해했다며. 나는 그 이야기를 천천히 듣고 정성들여 젤리의 가치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의 애착과 책임감에 대해서, 그리고 스스로의 능력을 바탕으로 신뢰를 얻어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는 것을. 너는 전혀 부족하지 않고, 선배가 젤리의 일하는 모습을 미처 보지 못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본인만의 목표를 높게 잡고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일희일비하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같은날 회사 동료 풀잎은 여기저기서 받은 제안에 고민했다. 내가 제안을 받은 것도 아닌데, 나는 신이 나서 각 제안마다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을 같이 이야기했다. 미래 가치로 봤을 때는 A가 더 전망이 좋네요, 풀잎씨를 정말 원하는 곳은 B네요, 다만 이득은 둘 다 드라마틱하지 않네요. 제안의 선택은 결국 풀잎이 하겠지만, 어쨌든 만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건 사실이라 아쉬운 마음이다. 하지만 또 언젠가 만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기쁜 마음과 축하하는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한바탕 이야기를 하고 자리에 앉았더니 사무실이 조용하다. 사실 우리 팀은 여러가지 이유로 조금 지쳐있는 상태다. 그러던 중 막내 팀원분이 어떤 일을 스스로 하고 계신다는 걸 들었다. 그 일은 우리 팀에 꼭 필요한 일이지만 공론화되지 않아 굳이 손대지 않던 일이었다. 그 팀원분은 '다들 처져있는데 저라도 힘내서 해야죠'라는 말을 했다. 주인 의식을 가진 모습을 보며 괜스레 반성이 되었다.
저녁에는 옆 팀의 막내 소식을 들었다. 동료들은 '너 아직도 몰랐어?'하는 표정과 함께, 근로 중에 어려움을 겪어 휴직 중이라는 얘기를 해줬다. 약간의 공황 증상이 있다고 한다. 공채로 들어와 받은 은연한 눈빛들과, 우리 조직에서 특히 1년차에 겪는 어려움이 뭔지 알기에 가슴이 찡해졌다. 그나마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나였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미안해졌다.
퇴근하고 돌아오니 동글이가 화를 삼키고 있었다. 동글이는 이번 달 보고 대부분을 준비했고 실무 PM 역할까지 병행했었다. 그래서 근로 시간이 초과되었더니, 근로 시간을 이용한다는 듯한 뉘앙스와 함께 동글이에게 말일 근무를 쉬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동글이가 새벽까지 기꺼이 일했던 이유는 '그럼에도 조직에 필요한 일'이라 판단한 책임감 때문이었는데.. 내 일처럼 화가 났다. 머릿속으로는 당장 사무실에 가서 뒷통수를 때리는 상상을 했다. 나는 동글이가 잠들 때 까지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침대에 뒤척이며 나의 하루는 어땠는 가 생각했다. 오늘 남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는 정말 많은데, 나는 거짓말같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한편으론 그래서- 내 마음의 그릇이 차있지 않아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 정성스럽게 반응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만약 버거운 상태였다면 젤리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거나 오히려 나도 젤리를 재단했을 지 모른다. 내가 불만족스러운 상태였다면 풀잎의 상황을 부러워하여 침묵하거나 비아냥 거렸을 지도 모른다. 패배주의가 있었다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한다며 잔소리했을 지도 모른다. 내 상황을 비관하는 중이었다면 막내의 소식에도 본인 탓이라고 쏘아붙일 지도 모른다. 내가 화가나는 일이 있었다면 동글이의 상황보다 내 상황이 더 어이없다며 역으로 화를 냈었을 지도 모른다. 내 마음의 그릇이 넘치기 직전이었다면 일어났을 것 같은 상황들을 상상하며- 마음의 그릇이 조금은 비워져 있어야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마음의 그릇이 중요하다 한들 매일매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세상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이라니, 정말 떠올리기도 싫다. 내 주변 사람들을 포용하기 위해 아무 일 없이 산다는 건 실제로 가능하지도 않지만, 다만 내 마음의 그릇과 에너지가 많아지는 것에 대해서는 상상을 해보기로 한다. 나에게 일어나는 어려움 말고도 남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반응할 수 있는 그런 넓은 마음가짐말이다.
나는 많이 자라고 싶다. 더 큰 사람이 되어 내게 일어나는 일도 차분히 해결하고, 내 소중한 사람들의 일에도 진심으로 관심을 두고 싶다. 큰 마음의 그릇을 가진 나를 상상한다. 지금은 많이 부족하지만, 언젠가, 내 일을 하고도 남들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조금은 뻔뻔하지만 오늘 이런 생각을 했으니 언젠가는 가능하겠지!하는 낙관적인 마음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