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천성
남들이 볼때 나는 조용한 편이지만, 사실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소문을 떠벌리는 편은 아니지만, 은근한 이야기를 알고 싶어 한다. 남들을 깔보거나 평가하지는 않지만, 남들에게 우월해보이고 싶어 한다. 모두가 그렇지 않냐고? 글쎄 왠지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그 정도가 심한 것 같다.
다행히 집에 오면 이런 수다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 매일 밤 나는 동글이에게 내 친구에 대해, 직장 동료에 대해,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떠든다. "그랬지뭐야"하는 어쩔 수 없는 말투로 내가 접한 것들에 대해 내멋대로 떠든다. 다만 나는 달변가가 아니기 때문에, 또 하고 싶은 말이 너무 쌓여있기 때문에 하고싶은 말을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시시하게 이야기를 끝내기도 하고, 중간에 싫증나면 갑자기 말을 멈추기도 한다. 그럴때면 동글이는 너무 많이 생략해서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나는 다시 부연 설명하기도, 화제를 아예 돌리기도 한다. 사실 나는 동글이에게 종알거리는 것 자체로 갈증이 풀린다. 어쩌면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 것보다, 내가 타인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의존적이다. 겉에서 볼때는 딱딱하거나 차가운 이미지지만, 남에게 기대고 싶어하고 대신 답을 내려주기를 원한다. 또 내가 의존하는 만큼 상대방이 내게 의존하지 않을 때(존중하지 않는 느낌이 들 때) 화가 난다. 나는 동글이에게 의존하기도, 화내기도 한다. 다만 동글이를 제외한 경우, 실제로 30년 간 딱히 의존을 자처한 적은 거의 없었다. 인생을 살아내는 것만 해도 벅찼고, 앞서 말한 그 잘난 성향 탓에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그런 존재가 되려고 했다. 그래서 그런가? 내 사주에는 외롭다는 말이 많다. 해피엔딩도 있지만 '굴곡'과 '외로움'이라는 단어는 빠지지않고 꼭 등장한다. 파도가 많은 인생인가. 내 손바닥에는 잔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파도하니 생각나는데, 나는 비교적 꽤 험난한 사회생활 중인 것 같다. 4년 차에 벌써 팀을 4번이나 옮겼다. 실 단위로는 3번째, 아니 이제 4번째가 되는건가? 그 중에는 쫓겨난 상황도 있고, 스카우트 된 상황도 있다. 매니저에게 예쁨을 받기도, 미움을 받기도 했다. 동글이는 6년째, 내 사업 동기들은 4년 째 같은 팀에 있는걸 보면 사내 이동이 쉬운 건 아닌 것 같은데 신기한 일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의 ENFJ적인 성향이 한 몫 하는 것 같다. 직설적이고 하고싶은 말을 해야하는 성격. 공평하진 않더라도 공정함은 양보할 수 없는 성격. 이 천성 덕에 회사에서는 이득보다는 실이 더 많았다. 결과론적으로만 보면 이득일 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볼 땐 매니저의 눈 밖에 나기 쉽고 평가받는 빈도도 잦아지는 것 같다. MBTI에 대해 덧붙이자면, 대학생 때는 ENTJ 였는데, 일을 하면서 ENFJ로 바뀐거다. 결국 일에서는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요즘엔 그냥 성격죽이고 월급이나 따박따박 받는게 이득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사평가 B, B급 전사로 퇴직까지 존버하기! 유후! 성격 죽이고- 있는 둥 없는 둥- 좋은 게 좋은 걸로- 욕심 부리지 않는 여유있는 삶.
근데 최근 돌아가는 꼴을 보면 아무래도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닌가보다. 최근 여름이라 그런지 도시 한복판에서 태풍을 만나기도 했고 말이다. 세상은 왜 날 가만히 두지 못하는걸까? 태풍이라는 표현은 맥락 상 이해 못할 수 있는데, 일부러 난해하게 쓴 말이 맞으니 넘어가도 된다. 여튼 일복이 터졌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나는 일이 정말 많고, 앞으로도 많을 예정이다. 앞으로도 그 잘난 우월감을 가지고 일을 하게 될 것 같다.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써놓고 보니 약간 성격파탄자가 떠오른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다 모난 부분이 있고, 다 싸이코같은 부분이 있지 않는가? 다 사람들이 남들에게 관심이 없을 뿐이라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게 나는 기괴하지만 썩 괜찮다 생각하는 내 천성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조합해보면, 그래도 이런 성격 덕에 지금까지 많은 것을 손에 쥘 수 있었다. 20대의 우월함과 실행력은 많은 일을 벌리고 해내게 해주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 덕에, 간혹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가까운 사람들이 기꺼이 도와줬다. 의존적이고 떠들고 싶은 욕구들은 그때 그때의 남자친구들이 잘 해결해줬다. 천성이 눌변이라 말보다는 글을 쓰면서 살았고, 독보적인 최강 워드 기획자가 되었다. 불공정은 못참지 하면서 달려들었던 성격들은 종종 나를 곤란하게 했으나, 이건 시간이 가면서 눈치를 챙기게 된 것 같다. 이런 성격 탓에 나는 항상 새로운 무리와 새로운 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렇게 보면 사람들은 진짜 자기 성격대로, 천성대로 살아가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앞으로도 기괴하지만 썩 괜찮은 천성들을 조합하고 뜯어 고쳐가면서, 더 잘 살아가볼 예정이다. 지금까지도 꽤 괜찮았으니, 딱히 큰 일은 없지 않을까 싶다. 내 자랑만, 내 얘기만 너무 늘어 놓았다.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고 나니, 이제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은 어떤 성격으로 오늘까지 살아올 수 있었는지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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