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즐거움 필사
최근 런칭을 준비하고 있다. 매니저의 시선은 '시장에 어떻게 어필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 매니저들도 팀장도 신경써주지는 않지만, 일정 안에 라이브 되어야 하는 프로젝트들도 있는 법이다. 10% 정도는 조금 억울한 감이 있지만 마땅히 준비되어야 할 업무를 외롭게 쳐내고 있다. 어느 날은 커다란 이슈를 한꺼번에 처리했다. 법무 이슈 체크, 외부 심사 준비, 리소스 개선, 내러티브, 혜택 협의 등. 유관부서에 통일된 의견을 받아내는 일은 리소스가 특히 많이 든다. 시간을 달리고 달려, 저녁 10시쯤에는 그 많던 일들을 거의 다 처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일을 다 뿌수고 나면 기분 좋은 피로감이 생긴다. 나는 예전부터 이를 '다이엔돌핀'으로 부르곤 했다. 다이엔돌핀에 심취된 나는 보낸 메일을 보고 또 보고, 정리한 문서를 열어 들락날락 거리곤 한다. 회사는 나의 전부같은 일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렇게 성취를 이룬 날에는 스스로가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알랭 드 보통이 설립한 인생학교에서 지은 '소소한 즐거움'이란 책이 있다. 책에서는 '사람들에게 홀대받고 있는 수많은 행복의 원천을 깊게 들여다보면 (소소한 행복안에 숨어있는 농밀한 의미를 알아차린다면) 인생에서 중요하고 큼지막한 테마로 다가서는 문턱까지 다다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일상의 소소한 행동들이 삶의 잔잔한 물결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가 좋아 읽기 전에 몇 편을 골라서 읽고 있다.
오늘도 집으로 돌아와, '일 빡시게 하고 나서 오는 만족감에 대한 글도 있을까?'하는 마음으로 책을 열어봤는데.. 아니 진짜 있잖아? 많은 일을 해냈을 때의 자신감을 여러 의미로 해석해 놓은 부분이 인상깊어 필사했다. 혹, 이 글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가 얼마나 근사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지에 대해 충분한 으쓱함을 느껴도 좋을 것 같다. 서평은 다음에 쓸지, 안쓸지 모르겠지만 자기 전에 편하게 읽어보기 좋으니 꼭 읽어보길!
밤 9시 45분. 당신은 늦은 시간까지 온 에너지를 쏟았다. 저녁은 책상 앞에서 구운 샌드위치로 때웠다. 이따금 키보드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손으로 떨어내면서 눈은 계속 모니터를 응시했다. 힘들었지만 이제 다 끝났다. 계획했던 만큼의 일을 마쳤다. 내일 아침이면 또 다시 힘겨운 하루가 시작되겠지만 오늘 해 놓은 일 덕분에 어지간히 안심이 된다. 내일은 여느 때처럼 허둥지둥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고단한 몸은 이미 녹초가 되었다. 끈덕지게 앉아 몰두하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지만, 해내서 다행이다. 등 가운데 부분이 무지근하게 아파온다. 크게 하품을 하면서 목을 이쪽저쪽으로 돌려본다. 몸을 쭉 뻗어 스트레칭하고 왼쪽 어깨죽지 밑의 불편한 부분을 꾹꾹 주무른다. 잠시 후면 잠자리에 들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이 충만하고 만족스러운 순간을 최대한 오래 음미하고 싶다. 이쪽저쪽 어슬렁거리다가 차를 한 잔 타 마시거나 혹은 와인 약간을 유리잔에 꼴꼴꼴 따라 마시는 것도 괜찮겠다. 아니면 심드렁하게 신문을 훑어보는 것도 좋겠다. 어짜피 잔뜩 집중하기는 힘들다. 하루 종일 제 할 일을 충분히 해낸 두뇌가 더 이상의 일은 하기 싫어하는 탓이다.
힘들었지만 보람찬 하루를 끝마친 뒤에 우리가 느끼는 행복함은 의지력의 발휘라는 긍정적인 경험과 연결돼 있다. 그만하고 싶은 욕구가 불쑥불쑥 올라온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신은 그 일을 내일로 미룰 수도 있었다(지금까지 얼마나 자주 그랬던가). 집중력이 흐트러져 딴 짓을 할 수 있었다(너무 익숙한 풍경이다). 아니면 몸은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머릿 속으로는 뉴욕의 화려한 아파트로 이사하는 상상을 하거나, 최신 연예 기사나 클릭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눈앞의 중요한 업무에 꼼짝 않고 집중했다.
또한 그 행복감은 무언가를 장악했다는 만족감과도 관련이 있다. 그 일을 하기 전에는 사실 약간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결국 그 일을 감당해냈다. 누구나 어떤 일을 해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순간이 있다. 일 자체가 너무 어렵거나 해결책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혹은 동시에 너무 여러가지를 처리해야 한다. 어떤 때는 수많은 세부 사항을 정리해 논리 정연한 모양새로 만들어야 하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곤란한 이메일에 단호하지만 요령껏 답장을 써야 하고, 상대방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거절해야 하고, 비판적인 의견을 세심하면서도 명료하게 내놓아야 하고, 막연한 직감으로 떠오른 아이디어를 일목요연한 기획안으로 완성해야 한다. 그리고 막연하게 생각했을 때는 훌륭한 아이디어 같았던 것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시원찮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순간이 어김없이 찾아온다. 분명히 끝내주는 아이디어인 이유가 있었는데... 그게 뭐였지? 혹은 보고서를 고쳐 써야 하는 상황인데, 이미 해놓은 업무를 요목조목 뜯어봤을 때 예전에 늘 겪었던 문제가 또 다시 발견될까봐 두렵다. 그래도 당신은 결국 해냈다. 흐트러지고 무너지려는 힘에 맞서 노력한 결과다. 산만하고 혼란스러웠던 것에 제자리를 찾아주고, 깔끔하게 정리하고, 조리 있게 설명해냈다. 혼란의 물결에 모든 게 뒤덮이는 것을 잘 막아냈다.
피곤하지만 성과를 얻는 하루를 끝마친 기쁨에는 보다 커다란 의미가 숨어 있다. 일을 끝낸 순간의 후련함이나 마무리한 일 자체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문제들에도 잘 대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해결할 수 있고, 힘든 과제를 감당할 수 있으며, 그 일을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노력을 멈추지 않는 능력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혼란과 방황에 대한 두려움을 위한 해독제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안에 있음을 느낀다. 평소 우리는 주변의 온갖 요구에 짓눌리게 될까 봐 걱정하고, 상황이 곪아터질 때까지 미루거나 내버려두는 자신의 못된 습관도 잘 안다. 하지만 집중해서 힘든 일을 끝낸 뒤에는 다른 인식이 찾아온다. 한곳에 몰두하면서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스스로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깨달음 말이다. 우리는 그만두거나 딴 짓을 하고 싶은 유혹을 기꺼이 물리치고 한 가지에 끝까지 매달려 끝내 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일을 해낸 오늘만큼은 스스로를 작은 영웅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피로감은 종종 무언가를 포기해야 할 이유가 된다. 쓸 수 있는 힘이 다 소진되었기에. 중요한 일에 손을 대야 하지만 두뇌 에너지가 방전되었기에, 문제의 해결책을 아직 찾지 못했지만 이미 지쳤기에, 포기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피로감이 반갑다. 우리는 하루의 끝에서 소중하고 값진 피로를 경험했다. 에너지가 바닥나서 짜증나기는커녕, 그 기분 좋은 피로감이 하루의 노고에 대한 자연스럽고 정당한 보상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숙면을 위한 좋은 재료가 되어 줄 것이다. / 성과를 얻은 날의 기분 좋은 피로감, 1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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