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빵떡씨의 극비 일기 독서 에세이
빵떡씨 작가 <신입사원 빵떡씨의 극비 일기>에 대한 독서 기록입니다. -2021. 01. 20
아... 이건 각이다... 몸살 각이다...
입사 이래로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다. 야근하면 먹는 야식은 몸을 살 찌우고 택시 퇴근은 심신을 편안하게 하니 아플 이유가 무엇이랴. 직장인의 3개 영양소 카페인, 타우린, 니코틴까지 챙겨 먹으니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이런 내가 몸살이라니. 아무래도 2주 전부터 살 빼겠다고 헬스니 뭐니 염병을 한게 원인인 것 같았다. 분명 운동 때문에 아픈건데 산재 처리를 하고 싶은 건 기분 탓이겠지. 누워서 생각했다. '연차를 쓰자', '아니다. 오늘까지 완성해야 하는 보고서가 있다' 노동자의 권리와 노예 근성이 머릿 속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자기 연민이 점점 과해지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회사에서 울자. 그럼 반차를 쓰라고 하겠지'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야무지게 그런 다짐을 했다. 출근하자마자 카톡을 켜서 동기방, 소모임방, 사원방 할 것 없이 아프다는 소식을 알렸다. 카톡으로 날아오는 걱정에 취해 오열 각을 슬슬 잡았다.
갑 뒤에 을, 을 뒤에 병, 병 뒤에 병신, 아니 병정무기경신... 회사 밖에서 대행사는 대부분 갑이 아닌 을, 병, 정인 경우가 많습니다. 회사가 을, 병, 정 이라도 돈을 주는 사장님은 다시 갑이니까 대행사 신입사원은 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끝 중의 끝이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먹이사슬의 최약체- 홍보대행사의 신입사원 '빵떡씨'가 대행사에 대해, 신입 생활에 대해, 회사 처세에 대한 하루하루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일상이 모여진 책이 바로 '신입사원 빵떡씨의 극비 일기'입니다.
저는 우선 책을 쓰게 된 작가의 마음가짐이 너무 좋았는데요. 회사를 다니더라도 글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고, 뭐라고 작은것이라도 당장 쓸 수 있는 것부터 써보자는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꽤 구체적인 조건도 정해서 말이죠. 가장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니 회사에 대한 글을 쓰고, 시간이 없으니 일기처럼 짧게 쓰기, 매일 쓰는 건 아니고 꾸준히에 의미를. 주제로는 가장 잘 쓸 수 있는 회사 욕, 다음은 팀장 욕, 다음은 대리 욕을..! 재밌지 않나요?
그래서 이 이야기는 에피소드 형태의 일상 공감 류가 많습니다. 앞서 필사로 소개했던 몸살 이야기도 그렇죠. 너무 일하기 싫어서 연차 각을 만든다던지, 팀장님 대리님이랑 피파 이야기만 하다가 옆 팀이랑 화장품 얘기하니까 너무 행복했다던지, 밥 먹으면서 회의하려 했다가 3차까지 술만 먹고 끝났다 라던지, 나간다 나간다 하던 사람들이 진짜 갑자기 무더기로 나가버리는 상황이라던지. 사무실에서 합리적으로 딴짓하는 방법 이라던가. 화려하면서도 심플한걸 원하고 B급인데 짜치는 건 싫어하는 클라이언트를 까는 내용까지. 하나 하나가 친구 회사 이야기를 듣는 것 마냥 흥미롭고 수다스럽습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일상물 애니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종종 에피소드 같은 하루들이 있지 않나요? 혹은 얘기거리는 아니지만 혼자 킥킥대는 소소한 하루들이 있잖아요. 그런 하루들이 매일 차곡차곡 쌓이면, 우리는 어느샌가 사무실. 팀. 새로운 환경들에 익숙해졌다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좋은 것들만 얘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화가 나는 상황들은 익숙해지기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을 더 힘들게 하기도 하죠.) 분명한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지나왔던 것들이 결국 현재의 나에 영향을 주고 앞으로의 나에게도 영향을 줄거라는 거에요. 그래서 저는 순간순간을 기록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하거나 의미가 있는 사건이 아닐지라도 매 순간 내가 받아들이는 상황과 느끼는 감정들을 정리하면 내가 무엇에 영향을 받고 어떤 것에 신경을 쓰고 있는 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기록이 쌓이면 스스로가 생각하는 방식이 변하는 것도 살펴볼 수 있고 익숙해진 상황 속에 안일해지는 모습도 경계할 수 있거든요. 무엇보다 글 쓰는 과정에서 나의 가치관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나를 살피기 위해 지금을 기록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제 이야기에 동의하신다면, 이를 먼저 실행한 <신입사원 빵떡씨의 극비일기>를 참고서처럼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읽으시면 알거에요.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하루를 기록하는 것은 생각보다 사소하고 아기자기하다는 것을요.
책의 흥미로움 중 하나는 일상의 장면들을 시트콤처럼 표현하는 부분입니다. 저는 물론 빵떡씨를 잘 모르지만 대행사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클라이언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얘기만 한다던지, 업무 추진이 어려움에도 개인의 능력을 언급하면서 채찍질하는 특유의 분위기, 현장감이라 퉁치는 근무 환경, 업무량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인력들을 말이죠. 책에서 들려준 내용을 통해서도 대충 빵떡씨가 일하는 여건이 체계적이거나 쾌적하지 않을거라는 예상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그럼에도 글에는 유쾌함만이 묻어난다는 것. 바로 이 책의 핵심입니다. 불합리한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날테고 답답한 순간을 훨씬 많았을텐데, 글의 주제가 회사임에도 누군가를 지하 던전 44층까지 끌어내리는 글은 쓰지 않더라고요. 작가는 힘든 일을 해학적으로 푸는 것을 좋아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는데요. 그래서일까요. 분명 힘든 일이 셀 수 없이 많았을텐데도, 책에는 활이 넘치고 골때리는 이야기들은 있지만 우울이나 미움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분명 에이전시에서의 1년차는 미움과 자기 연민, 회의감이 넘쳐나는 시기인데 말이죠!) 예를 들어 팀장에 대해서는 이정도로만 언급합니다.
몇 번 욕을 하긴 했지만 팀장님의 모든 면이 다 좋을 수는 없는거고 또 왠지 팀장이라는 직급은 숨을 왜 저렇게 쉬냐는 이유만으로도 욕을 하고 싶기 때문이지 진심으로 싫어하는 건 아니다. 욕을 하자는 게 아닌데 자꾸 욕으로 흘러가는 건 다시 한번 말하지만 팀장이란 직급 때문이다.
사실 저는 팀장 욕만으로도 매일 원고지 10장을 채울 자신이 있거든요. 어떤 행동을 잘못했고, 어떤 역량이 부족하고, 어떤 면을 중요시 여겨야하는 지 밤새도록 설교할 수도 있어요. 실제로 입사 후 2년 동안은 직책자의 자격과 책임에 대해서만 잣대를 들이밀고 사람을 미워하는 글을 썼으니까요. (실은 지금도 사람을 곧잘 미워합니다.) 그런데도 저보다 어린 작가가 이렇게 어른스럽게 상황을 잘 넘기고, 또 책까지 썼다는 것을 보면 괜시리 부끄러워 지기도 합니다. 미워하는 감정과는 별개로 상황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은 제게 문제를 풀어가는 또 다른 방법을 알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책 표지에서는 이런 방식을 '인턴에서 대리까지 풍자와 해학으로 견뎌온 어느 신입사원의 정신승리 분투기'라고 적어놨는데요. 제가 느낀 작가의 이야기는 흔히 아는 정신승리와 약간 달랐지만.. 뭐 이목을 끌기 위한 가장 가까운 단어가 정신 승리여서 그런거겠죠. 여튼 책에서는 해학, 풍자, 희화화, 정신승리, 흥청망청, 유쾌함이라는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 시원함(사이다 아님)과 다정함, 공감이 있습니다. 혹 이런게 정신승리라면 다함께 정신승리를 배워봐도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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