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의 온기 독서 에세이
윤고은 작가 <빈틈의 온기>에 대한 독서 기록입니다. -2022. 02. 16
처음에 책을 읽을 때는 '세상에 어떻게 이런 미친 텐션의 웃긴 사람이 있을까?'라고 느꼈다. 책을 다 읽어갈 쯤에는 '빈 수레가 요란한 사람들의 빈틈이 아닌, 내면이 꽉 찬 사람이 거리낌 없이 보여주는 빈틈이란 이런거구나'라고 느꼈다. 소설가이자 라디오DJ인 윤고은 작가님의 <빈틈의 온기>라는 책이다.
우스운 빈틈으로 활력을 채우는 사람
이 책의 첫 번째 매력포인트는 일상 속의 누구나 공감하는 빈틈들을 정말 웃기게 표현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퇴근 길에 배가 고프지 않아도 무언가를 사서 집에 간다던지, 분명 청소를 했는 데도 집이 자꾸 어질러지는 상황들을 이상한 은유를 써서 웃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자신의 삶을 소설처럼, 시트콤처럼 각색하는 재치를 가진 사람들을. 빵떡씨가 그랬고, 양다솔씨의 책이 그랬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이 책에서는 그들과 달리 자조가 거의 없다는 점. 100% 순정 시트콤인 셈이다. 작가가 가진 생활의 빈틈을 빈틈있게(딱딱하지 않게) 이야기한다. 초반 2~3편의 글을 읽자마자 책에 홀딱 빠져버렸다.
책장 정리의 핵심은 일단 책장 위에 책이 아닌 다른 것을 두지 않는 것이다. (중략) 아무리 잠깐이라도 책장에 내려놓지 않는 것이다. 나는 지금 그것을 잠깐이라도 책장에 내려놓으면 어떤 상황이 따라오는지 내 눈으로 증언하고 있다. 그것을 내려놓으면…, 그들은 거기에서 번식을 한다. 아무리 봐도 책장은 담백한 수납가구라고 할 수가 없다. 모두가 입주하기 원하는 주거공간이다.
그래도 내 하루 중에 출근길의 가방이 제일 홀죽한 상태이긴 하다. 방송이 끝나면 이상하게 조금 더 불어나 있고, 동네로 오게 되면 더 불어나니까. 매일 그런건 아니지만 과일이나 빵이나 무언가가 퇴근길의 나에게 들러붙는다. 그럴 때 가방 안에 숨어 있던 장바구니를 동원할 수 있다면 나는 정말 센스쟁이!
어떤 열차들은 휴대폰을 들고 타는 것까지만 허용한다. 보는 건 불가능할 수도 있다. 책장 넘기는 건 거의 사치다. (중략) 콩나물 중의 하나로 서서 나는 아무거나 읽기 시작한다. 열차 내 광고판의 글자들, ‘하지정맥류’는 또렷하게 보이는데 그 옆 지하철 노선도의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깨알처럼 작다. 한쪽 눈을 감아본다. 잘 안보인다. 반대쪽 눈을 감아도 마찬가지. 난 어느새 시력 측정을 하고 있다.
반복되는 시간을 인생의 한 순간으로 기억하다
책의 두번째 포인트는 퍽퍽하고 반복된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작가의 의미부여와 물음이다. 작가는 이런 일상으로 '출근길'을 골랐다. 출근길이야 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지루하고 루틴한 시간이니까. 쪽잠을 자거나, SNS를 빠르게 훑거나, 웹툰이나 클립을 보기도 한다. 작가도 매일 신분당선을 시작으로 환승까지 거쳐 길고 긴 출근길을 거친다. 작가는 이 출근길 속에 공감가거나 사소한 재미 포인트를 짚어내거나, 사람들을 관찰하며 새로운 의미를 제안하기도 한다. 우리가 살면서 짧게 감탄했던 지하철의 풍경 하나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이야기한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새삼 새로운 것이 아님에도, '아 그렇지' 하면서 일상에서 느낄 수 있었던 메시지를 다시금 알아차리게 된다. 책을 읽으며 '지루하게 보냈던 시간들을 반복된다는 이유로 당연하게 흘려보내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정말 카피를 잘 뽑았다고 생각한다. '출근길이 유일한 산책로인 당신에게'. 재미없는 출근길이, 유일한 산책로라는 자조 속에서도, 우리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반복되어도 같은 시간은 하나도 없으며, 그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 이후 한강을 건너는 구간은 3호선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책갈피 역할을 하고 있다. 책갈피 하나 있으면 읽던 책의 페이지 모서리를 살짝 접지 않아도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것처럼, 한강을 열차로 통과하는 우리 심정도 비슷하다. 잠시 고개를 들어 저 바깥 풍경에 마음을 내어주고, 열차가 다시 어둠 속으로 내려가면 마음도 제자리를 찾는다.
지하철 타는 우리의 모습을 조가도처럼 위에서 내려다보면, 환승이 지하철 타기의 꽃이라는 걸 알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뛰고 걷고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두 개의 물결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중략) 나는 오늘 좀 빡빡한 환승에 성공했지만 언제나 가장 부러운 사람은 무언가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다음 열차가 언제 도착하거나 말거나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사람들. 이건 꼭 시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나는 신분당선의 끝 칸에 타서 쭉 뻗은 선로가 하나로 모이는, 우리가 소실점이라고 부르는 그 지점을 응시하길 좋아한다. 열차가 출발하면, 바로 코앞에 있었던 것들이 점점 멀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조금 전까지 3미터 앞에 있었던 등불 하나가 순식간에 과거가 된다. 그 옆의 등불도 그렇다. 어떤 점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지는 일, 눈 닿자마자 과거로 놓아주는 일, 돌아보면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경험한 게 바로 그런, 작은 이별들이다. 우리를 올게하는 이별도 있지만 우리가 알아챌 틈을 주지도 않고 멀어지는, 기척 없는 이별이 훨씬 많기도 하고. 물론 열차는 우리 삶보다 조금 더 관대해서 적어도 2,3분에 한 번씩은 잠시 멈춰선다. 이 열차의 끝, 계속 갱신되는 저 소실점을 보고 있으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은 과거가 된다. 지금 이 순간도 흘러간다. 돌이킬 수는 없다.
가벼운 빈틈으로 꽉꽉 채운 삶에 대해
이쯤되면 작가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지가 궁금해진다. 책 앞 날개에 쓰여진 작가의 소개에는 직업 외에도 여행자, 지하철 승객, 자전거 라이더, 책이 산책의 줄임말이라 믿는 사람이라 적혀져 있다. 책을 점점 읽으면서 '이 사람 정말 난 사람이구나' 느꼈던 포인트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책에는 실제로 산책과, 지하철 출근과, 여행에 대한 내용들이 빠짐없이 모두 에피소드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고 나서는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아니 보통 저런건 자기 만족용 수식어 아니었냐구~? 작가는 이 소개가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300페이지 가량의 책 안에 모두 집어 넣었다. 귀엽고 재치있는 빈틈있는 에피소드로 자기 삶을 꽉꽉 채워 사는 사람. 과연 우리는 이 사람을 빈틈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을까? 빈틈은 참 역설적이다.
“오르막이 보이면 미리 가속한 힘으로 올라가는 거야. 기어 변속을 못 하는 자전거라면 더, 기어 변속이 되면 미리 바꿔놓고. 어떻게 보면 인생이랑 닮은 것 같지 않아? 예열하고 준비하는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거잖아.” 호이안에서 L이 했던 말을 종종 떠올린다. 내가 오르막길을 만날 때 마다 예열하고 준비한 힘으로 통과하는 건 아니지만, 내려서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기도 하지만, 우리가 맘만 먹으면 자전거에서 내리지 않은 채로 그 오르막을 통과할 수도 있다는 걸 보고 듣는 게 어쩐지 든든하게 다가와서 그 말을 좋아한다.
최근에는 이런 생각을 자주 했다. 자전거로는 왜 우아한 후진을 할 수 없는가? (중략) 바퀴의 궤적으로만 비교해보면 자전거는 자동차처럼 감쪽 같은 후진을 시도하는 게 영 어색한 이동수단인데, 어찌 보면 바로 그 점이 우리 삶과 닮은 것 같다. 뒷걸음질로 계속 이동하려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가던 방향과 정반대로 이동해야 할 때, 사람들 대부분은 뒤였던 그 곳을 앞에 두고 걷는다. 그게 우리의 방식이다. 자전거와 우리는 감쪽같은 후진을 포기하고, 바퀴의 궤적을 새로 그리면서 돌아선다. 조금 전까지 등 뒤에 있던 세계를 이제 눈앞에 두고 달리는 것이다.
요즘 같은 검색 시대에는 쉽게 알아낸 정보들은 금세 잊게 된다. 호기심을 바로 해결할 수는 있지만 깨달음이 길게 지속되진 않는다. 대부분은 무엇을 궁금해했다는 느낌까지 함께 증발해서 빈자리조차 남지 않는다. (중략) 이 목소리 어디서 들었더라, 이 향기가 뭐지, 그걸 바로 해소할 수 있는 목소리 검색이나 향기 검색이 있다면 어떨까 하다가도 곧 정반대의 마음을 품게 된다. 아무리 해도 검색되지 않는 영역과 누구도 알 수 없는 세계가 건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 가족의 봄나들이 사진을 보면 해마다 한 사람씩이 늘어나 있다. 최초에는 두명이었을 것이다 부모님에 내가 추가되었고, 또 동생이 합류했다. 한동안 우리는 네명이었다. 거기에 내가 데려온 식구 그리고 동생이 데려온 식구가 더해졌고, 몇 해 전 조카가 태어나 일곱 명이 되었을 때 나는 꽃비 내리는 나무 아래 누워 포만감을 느꼈다. 한 몇과 한 명이 만나 또 한 명이 생기고 또 한 명이 생기고, 그렇게 늘어난 식구 수를 헤아려 보면 기분 좋은 포만감, 감사함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조금 쓸쓸하기도 했다. 먼 훗날 언젠가 식구가 줄어드는 때도 올 테니까 이 현재가 사라져 버릴까 속상해지고 마는 것이다. 나는 너무 앞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종종 앞서 슬퍼지기도 한다. (중략) 봄은 우리가 알던 모든 것에 유통기한 라벨을 붙여주면서 시작된다.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다고, 지금이 아니면 말할 수 없다고, 지금이 아니면 느낄 수 없고 작년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꽃이는 말이든 무엇이든. 오직 지금뿐이라고
책 후반부에는 작가의 차분한 감성들이 달린 이야기들이 많다. 평온한 하루를 보내면서 드는 생각들, 남들에게 들었던 내용 중 기억에 남았던 말들, 자전거를 타면서 든 생각들 말이다. 긴 책을 읽느라 고생 많았지, 이제 잘 마무리해볼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면이 가득 찬 사람이기에 기꺼이 작은 빈틈을 보여주는 책이었다일상의 작은 허술함이 스스로에게 허물이 되지 않는다는 자존과 사랑이 듬뿍 느껴지는 책이었다. 그 건강함이 느껴지는 책이라서 너무 좋았다. 친구 생일 선물로 기꺼이 선물해도 좋을 것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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