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단련 독서 에세이
이슬아 작가 <심신단련>에 대한 독서 기록입니다. -2020. 09. 06
이슬아 수필집 이후로 내가 꽂혔던 동갑내기 작가, 첫번째는 그의 담백한 소재와 솔직한 생각들이었고 두번째는 가족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리 사랑스럽게 풀어낼 수 있을까?였고 세번째는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 보는 에세이 특유의 감성이 기가 막혔다는 것 개인적으로 Notion 필사 노트에 기록해둔 것을 공유합니다. 왠지 누군가의 문장을 내 것으로 만든 것 같아서, 원석을 발굴한 느낌이 들어서 문장줍기는 매번 설렙니다
잘가 엄마! 응 내일 봐! 하고 헤어진다. 이어지는 밤과 새벽과 아침. 그리고 다시 만나는 복희. 지금이라고 인생이 우리의 손에 쥐어져 있나. 사실 영영 불가능하지 않나. 그저 이 날들을 흐리멍덩하게 흘려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일지 모른다. 또 다시 잃어버린 시절로 기억하지 않기 위해 복희와 먹고 얘기하고 걷고 만나는 순간을 이렇게 적는다. - 손에 쥔 인생
30대 중반이 넘어가면 특히 여자들은 엄마에 대한 애정이 생긴다고 강신 선생님이 얘기하셨는데 애틋한 엄마와 시간을 보내며, 하루하루를 느끼는 슬아 작가의 관계와 용기가 부러웠다.
쓰레기가 쓰레기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내 손에서는 그랬다. 나는 쓰레기를 잠깐씩만 만져왔으므로. 더군다나 쓰레기는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아직 쓰레기가 아니었으므로. 쓰레기란 내가 원하는 물질을 깨끗하게 감싸던 것. 손과 물건 사이의 얇고 가벼운 한 겹. 어느새 불필요해진 제품. 버리고 돌아서면 사라지는 기억. 그래서 아주 잠깐이었던 무엇. (중략) 쓰레기와 관련된 어떤 노동자들은 밤에만 일해야 한다. 누군가는 쓰레기를 수거하는 과정을 보는 것 조차 불쾌할지도 몰라서. 자기 손을 떠난 쓰레기를 곧바로 혐오스러운 남의 일로 여기곤 해서 - 쓰레기와 부모와 시
코로나로 배달 음식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플라스틱 소비도 엄청나게 늘어난다고 한다. 폐플라스틱을 예전엔 수출 했는데 이제는 그것도 불가능하고, 하루에 쏟아져나오는 양이 이전대비 몇배가 되어 처리가 힘들다 한다. 그럼에도 저녁을 고민하다 배달을 시키는 내가, 쓰레기를 기피하는 나의 모습이 슬아 작가의 누군가와 겹쳐 보였다. 그리고 일상에 치여사느라 수많은 이야기를 정면으로 보지 못했던 내가 부끄러웠던 글이었다. (작가가 동갑이라 더 움찔했다.)
아픈 남편이나 자식과 함께 무언가를 먹은 뒤 치우는 뒷모습들을 보며 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 비빌 언덕에 대해 생각했다. 만약 내가 아프면 복희와 웅이는 언제든지 달려올 것이다. 내 부모는 돈이 많지 않지만 늘 다정하게 내 뒤를 살펴주는 이들이다. 그런 부모를 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마만해도 간병을 해줄 사람이 나말고는 없었다. 내가 없어도 혼자서 어떻게든 했겠지만 좀 더 고단했을 것이다. (중략) 폐에 관을 꽂을 하마가 높은 침대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프지 않은 쪽의 팔을 뻗어 내 이마를 매만졌다. 익숙한 손에 쓰다듬어지자 나는 속수무책으로 잠들었다. 아픈 애보다 먼저 잠드는 것에 대해 해명하고 싶었다. 나는 정말 잘 먹고 잘 자야 된다고, 그래야 내일도 지치지 않고 즐겁게 병원에 머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너무 졸려서 입이 안얼렸다. 집에서처럼 하마가 나를 재워서 병원인 걸 까먹은 채로 잤다. 우리는 적당히 서로의 언덕에 기대어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 비빌언덕
'여름날의 기억'이란 키워드는 정말 매력적이다. 그 기억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낸 것이어도, 말도 안되는 일을 겪은 것이래도 납득이 된다. 처음 겪는 일임에도 익숙한 것들로 한겹한겹 덮으며, 비빌 언덕같은 안정감을 보낸 여름의 이야기
임은 낡은 기숙사 벽에 기대앉아 내 뒷모습을 보며 이런저런 얘길 꺼냈다. 누가 자기를 어떻게 놀렸는지, 선생님이 자신을 어떤 식으로 답답하게 여겼는지 하소연했다. 나는 '그랬구나'하고 잠자코 들었다. 몇 가지 조언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면 임은 더듬거리며 고맙다고 말했다. 재미없는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고. 나는 분명 친절했지만 그 친절은 관대한 상사 같은 친절이었다. 권위를 쥔 친절이자 상대를 내려다보는 친절말이다. (중략) 그 후로 둘은 정말 조용히 편지를 주었다. 나를 꾸준히 좋아하되 눈에 띄는 친구가 되지 않도록 주의했다. 기숙사에서 애들이 안 보는 틈을 타 몰래 편지를 건넸을 임과 준의 모습을 지금도 생각한다. 편지를 부디 조용히 달라고 요구하는 열네 살의 내 모습도 뒤따라 반복 재생된다. 그런 일은 자꾸만 기억이 난다. 어떤 부끄러운 짓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중략) 그들의 졸업식을 구경하는 날엔 난데없는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커튼 뒤에 숨어서 부끄럽고 비겁한 나의 청소년기를 기억한다. 스물 여덟 살에 목격하는 열 여덟 살은 너무 생생하여 꼭 어제 일인 것만 같다. - 여자 기숙사
미숙했던 우리의 청소년기가 떠오르는 글감. 미숙했지만 미숙하다는 말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는 시절, 그러나 미숙했다는 말밖에 할 수 없던 날들. 친구들의 무리와 시선에 예민했던 날들, 다시 돌아갔어도 반복했을 어린 시절의 나. 나도 누군가에게 권위있는 친절, 내려다보는 친절을 휘두른 적이 있기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들이 다른 누군가와 더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안도를 느낀다. (중략) 그것은 사랑이 가져다 줄 수도 빼앗아갈 수도 없는 소중한 것이다. 나는 창문과 대문을 서성이며 그들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마치 해시계처럼 무한한 인내심으로 항상 너그럽게 그들을 이해한다. 사랑이 결코 이해 못하는 것을. 언제나 관대하게 용서한다. 사랑이 결코 용서 못하는 것을. 첫 만남부터 편지를 주고받을 때까지 영원의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단지 며칠이나 몇 주일만 기다리면 된다. 그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언제나 성공적이다. 음악회에 가도 끝까지 집중할 수 있고, 대성당을 구경할 때도 속속들이 살펴볼 수 있다. 주위의 모든 풍경도 또렷하게 잘 보인다. (중략) 만일 내가 삼차원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면, 서정적이지도 않은 공간에서 움직이는 지평선, 실존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그들의 덕택이다. 그들 자신도 모른다. 맨주먹 안에 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움켜쥐고 있는지 -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의 말
"너네들한테는 괜찮지만, 남친한테 할 때는 내가 봐도 아니다 싶을 정도로... 좀 그래" 가깝지만 적당한 거리의 애정을 가진 존재들 덕에 살아가는 날들이 있다. 사랑이 아니어서 이해되는 것들 카톡을 씹어도, 약속이 자꾸 밀려도 기꺼이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 덕에 활기를 되찾기도 한다. 나의 평안은 그들의 공이기도 하다.
슬아 작가는 분기 단위로 구독자를 받아 매일 연재를 이어나가고 있다. 어떤 날은 개인적으로 시시한 주제, 어떤 날은 개인적으로 무거운 주제들이 글감이 될 것이고 나는 내 기분이나 컨디션에 맞춰 글감을 골라 읽고 싶어 단행본으로 읽는 편이다. 필사 내용을 읽고 슬아 작가의 글이 궁금하시다면 첫번 째 에세이 <일간 이슬아 수필집>도 함께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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