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함의 문장
어릴 때 <디지몬 어드벤처>라는 애니메이션을 즐겨봤다. 거기에는 선택받은 아이들이 8개의 문장을 가지고 세계를 위협하는 악당 디지몬을 물리치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주인공은 용기의 문장, 라이벌은 우정의 문장, 히로인은 사랑의 문장… 막내들은 희망과 빛의 문장을 가진다. 나는 특히 순수의 문장을 좋아했다. 문장은 누군가를 대표하는 키워드같아서, 나도 그런 문장을 줄곧 가지고 싶어 했다. 그 중에는 가지기 싫었던 문장도 있었다. 바로 정석이라는 캐릭터의 <성실의 문장>이었다.
왜 싫어했냐고 묻는다면, 성실은 왠지 하찮아보였다. 타고난 대단한 능력같은게 아니라 대단하지 않은 사람이 겨우 노력하는 것으로만 보였다. 성실은 그렇게 노력한 사람에게 마지못해 쥐어주는 명예훈장같은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렸을 때 나는 스스로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쉽게 생각했나보다. 어릴 때 누가 머리를 쥐어박어가며 성실함의 중요함을 알려줬으면 어땠을까? 어른이 된 지금의 나는 성실하지 못한 내 모습에 자주 좌절하고 스스로에게 종종 화가 난다.
성실은 부지런히 쳇바퀴를 돌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매일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켜내는 일 이기도 하다. 자극적인 일에 양보하지 않고 방전된 체력에 타협하지 않고 계획했던 일을 묵묵히 하는 일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갑자기 생긴 번개에 혹하거나, 퇴근 후 녹초가 된 채로 자신과의 약속을 자주 박살내는 편이다. 그리고 자기 전에, 특히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침대에 누워 스스로를 반성하고 내일부터는 다른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그 다음주에도 똑같이 다짐하는 게 문제지만 말이지..) 단언하건대 내가 1%만 더 성실했다면 내 삶은 훨씬 더 풍요로웠을 것이다. 나의 나태함과 갈대같은 의지들은 성실함의 가호를 받지 못해 매번 픽픽 쓰러지거나 퍼져버린다.
성실은 단 하나의 오차없이 매일 수행되는 걸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실함은 ‘정기적임’보다 ‘장기적임’이 훨씬 더 어울리는 단어니까. 즉 성실은 순간 순간에는 공백이 있을 수 있지만 꾸준히, 장기적으로 점을 찍어 선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간 공백이 있더라도, 오늘 행하고 내일 행하면 결국 선이 만들어지는 것을 믿는 태도이기도 하다. 오늘 내가 다시 시작하면 성실함은 다시 이어진다. 그렇게 믿는다.
작년 이직 후 블로그 활동에 소홀했다. 중간중간 글을 썼지만 ‘애쓴다’라는 감정이 들 만큼 빈약한 활동이었다. 성실에 실패했다는 마음에 블로그 리셋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꾸준하지 않았던 모습을 숨기고 싶었던 것 같다. 근데, 그냥 다시 썼다. 뜸했던 기간을 내버려두고 그 위에다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도 또다시 종종 소홀했지만, 틈 날때마다 공백을 매워갔다. 그렇게 2021년부터 쓰여진 글들이 지금 내 블로그에 자리잡혀있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선이 그어진 공간을 보며, 이렇게 하나하나씩 시작하는거야 마음을 먹는다.
뭐니뭐니해도 성실의 가치는 행동이 쌓였을 때 시간이 증명하는 거대함일 것이다. 성실의 보상은 평범한 인간을 대가로 만들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단번에 얻을 수 없는 결과를 얻으며, 이를 만들어낸 개인을 신뢰하게 만드니까 말이다. 성실이란 조용한 혁명. 어쩌면 우리는 성실이 만들어 낸 결과물을 재산으로 살아가는 지도 모른다. 그 혁명에 누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느냐의 차이다. 지금처럼 살거나 지금부터 살거나의 차이는 그러한 차이일 것이다.
리니지M을 서비스할 때 채팅 창에서 다툼을 목격한 적이 있다. 스펙이 높은 유저가 낮은 유저를 조롱하는 내용이었는데 그 때 스펙이 낮은 유저가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 <야 리니지는 누가 끝까지 가느냐의 싸움이다. 지금 잠깐 쎄다고 우쭐대지 마라>. 당시에는 대단한 정신 승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보니 한 선생님의 통찰일지도 모르겠다 싶다. 나도 선생님의 말을 받아 우쭐대지 말고, 끝까지 갈 수 있도록 성실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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