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지션의 우선 순위
얼마 전 서러운 마음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지요. 평소 같았으면 한 귀로 듣고 흘렸을 텐데, 행사 준비로 쌓인 것도 있고 피로했던 지라 그냥 넘길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지스타 출장 기간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비록 선생님은 제가 울었던 걸 보지는 못했지만 제가 속이 상했던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모두다 떠난 다음날 따로 대화를 했죠. 저 역시 선생님의 의도가 나쁘지 않았던 걸 알고 있었기에, 당신의 의중은 이해하지만 다음부터는 특별히 조심해 달라고 말했더랬죠. 그날 선생님의 말은 위에서 아래로 줄을 세우는 다소 권위적인 이야기였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전했기 때문에 개의치 않답니다. 선생님도 잘 들어주셨고요. 우리 팀의 리더, 팀장인 당신에게 저는 여전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요.
다만 그날의 주제가 사업 PM으로서 명확하게 가져야 할 기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해서, 글로써 저만의 기준에 대해서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선생님을 향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글의 독자는 저인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날의 대화 주제는 <차기 리더, 우수한 사업 PM이 되기 위한 가장 유리한 포지션>에 대한 것이였지요. 물론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대화가 시작되진 않았어요. 시작은 최근 이직한 저를 격려하는 말이었죠. 잘하고 있다고요. 다만 앞으로 더 인정받기 위해서는 게임 콘텐츠를 분석하는 역량을 더 키워야 한다고 알려줬죠(선생님 처럼요). 스스로 약한 부분이기도 했고 공감을 했습니다. 이후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죠. 마케팅이나 홍보, 다른 일감을 하는 애들은 대체가 가능하다고요. 콘텐츠를 잘 알고, 개발사보다 게임을 더 잘 이해해야 진짜 믿을맨이 되고 회사에서도 매니저를 맡긴다고요. 결국 위로 올라가고 인정 받는 사업 PM은 콘텐츠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요.
처음으로 선생님께 '굳이 내게 이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면 제가 지금 지스타를 포함한 마케팅/홍보 일을 맡고 있기 때문이었어요. 저를 두고 언제든지 대체가 되는 포지션이라는 말은 저의 쓸모를 스스로 의심하게 만들었거든요. 더하여 소신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조직원을 포지션으로만 나누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두번째 의아한 점은 포지션에 우선순위를 매겼다는 점이었어요. 물론 게임 콘텐츠가 중요한 사실은 지난 5년간 많이 체감했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만 '게임 콘텐츠' 파트가 사업 PM에서 가장 유리하고, 가장 중요한 포지션이라는 점에서는 의문이 듭니다. 제 주변에는 데이터, 일감 관리, 시장 이해, 사업 전략 같은 여러 역량으로 조직을 이끌어온 리더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리더가 되거나 높은 직책에 오를 수 있는 독보적인 포지션은 없지 않을까요. 중요한건 리더의 자질이니까요. 조금 앓는 소리를 하자면, 저는 게임 콘텐츠에 대한 천부적인 소질에 대해서도 벽을 많이 느꼈어요. 타고나길 게임 이해가 높은 친구들이 있으니까요. 저는 대신에 데이터를 쓰고, 일감 관리를 촘촘히 하면서 제 역할을 해냈어요. 그렇기에 경험에서 온 좋은 의도에서 온 따뜻한 이야기가, 제 기준에서는 그 동안의 모든 경험과 노력을 부정당하는 말로 느껴졌습니다.
제가 물었어요. '이것저것 고르게 다 잘하면요? 게임 콘텐츠를 잘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걸 잘해도 승진하고 높이 올라갈 수 없나요?'. 정말 궁금해서 물은 것이 아니라, 정정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물었던 말이었죠. 대답을 들은 후 공허해졌어요. 선한 의도와 아끼는 마음으로 얘기해주신 점은 정말 잘 알고있는데도, 그날은 너무 허무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대화 당시 선생님에 대한 기대감도 깎여간 것도 조금은 사실입니다.
이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다행히 오해를 풀었어요, 선생님도 해주셨던 이야기의 일부를 정정해주시기도 하고요. 물론 저나 선생님의 말 둘 중 하나가 답이 아니라는 것을 당연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저 각각의 생각을 존중하고 들어주고 이해해주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선생님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배울 점이 있고 감사한 감정이 더 많이 드는 분입니다.
얼마 전 다른 리더분께 '지금은 제너럴리스트로서 많이 배우고, 나중에 무기가 생겨야 할 때 스페셜리스트가 될 수 있도록 해보자'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근데 사실 저는 업무에 제너럴리스트, 스페셜리스트를 두고 뭐가 더 좋냐 정답을 정해두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긴해요. 이 논리라면 누군가가 5점짜리 스페셜리스트에게 손을 들어주면 9점짜리 제너럴리스트는 바보가 되어버리니까요. 그분은 제게 언젠가 스페셜리스트가 될거라면 '문제 의식'을 기본으로 하는 분석력을 키워보라고 하셨어요. 좋은 말씀을 새기며 노력하겠지만, 참고로 저는 다 잘하는 제너럴리스트가 될거에요. 저는 실제로 다 잘하잖아요?
슬픈 감정을 가지고 썼던 글을 다듬고 또 다듬었어요. 볼 수 없는 글 임에도 부디 불편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스스로가 생각하는 사업 PM으로서의 역량과 포지션, 기준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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