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독서 에세이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독서 기록
철학 책은 읽는 데 늘 시간이 걸린다. 개인적으로는 매번 철학은 메시지 외 잡다한 내용이 꽤 많이 끼여 있다고 느낀다. 아마 사유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이 필요해서 그런 것 같다. 글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트에 열심히 꾹꾹 눌러 적어가며 읽었다. 책을 통해 네오 프로이트 정신 분석가이기도 한 프롬의 '행복의 기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서평은 개인적인 생각보다 에리히 프롬의 인간성 이론을 이해하는 데 중심을 뒀다.
먼저 알아야 할 점은 네오-프로이트 정신 분석가인 프롬은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인간이 수동적이며 소비의 필요성에 의해서만 동기를 부여한다고 여긴다. 프롬의 작품 대부분은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고, 개인의 발전을 위해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을 촉구한다. 오히려 소비에만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는 물질과 명성과 성공과 성취에 의존하지 말아야 하며, 사랑을 통해 창의력 또는 겸손과 같은 자질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삶은 성장과 변화의 과정이다
삶을 어쩔 수 없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과정이다. 반대로 말하면 성장과 변화가 멈추면 죽음이 닥친다. 다만 이러한 변화는 자기 안에 담긴 것으로만 이루어진다. 인간의 성격 등은 기본 구조(변하지 않는 것)로 두고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성장한다. 상호작용을 통해 체리나무는 더 크게 자랄 수 있어도 벚꽃나무가 될 수는 없다.
이러한 삶의 성장과 변화는 예측이 가능할까? 일부는 상호작용을 울타리 삼아 삶의 변화를 예상 가능하게 통제하려는 움직임을 가지기도 한다. 삶을 지배하겠다며 삶에도 질서를 강요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삶이 자기 손에 들어오기 않으면 분노하거나 실망한다. 자기 삶은 물론 자신이 애정을 쏟는 대상(타인)도 예측 가능하길 바란다. 그러나 삶은 여전히 놀라운 일로 가득하다. 사랑을 포함하여 삶은 손에 잡히지 않는, 사실상 무질서에 가까운 형질이다.
사랑이란 존재 자체의 수용이며 인내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앞서 사랑은 불확실하기에 예상하거나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여기서 모든 종류의 사랑에 적용되는 기본 원칙은 <내 사랑이 적절하고 상대의 욕망과 본성에 맞을 때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예로 적은 물을 필요로 하는 식물이 있다. 이 식물에 대한 사랑은 필요한 만큼의 물을 주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단순히 '사랑하는 것'만으로, 다른 생명체가 '잘 되길 바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상대가 뭘 필요하는지 모르고 무엇이 상대에게 최선인 지- 스스로가 정한 선입견과 상대를 통제하려는 욕망을 버릴 수 없다면 그 사랑은 파괴적이다. 죽음의 키스일 뿐이다.
사랑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사실상 폭력은 한 끗 차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통제하는 사랑을 늘 조심해야 한다. 특히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폭력 수단(재산/지위/명성)의 크기를 자기 인성의 크기로 착각하곤 한다. 그러면서 실제 자기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드는 노력(정신/사랑/생명력)은 전혀 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사랑 대신 폭력을 다루는 사람은 폭력 수단의 잠재력은 커질지 몰라도 자기 자신은 더 약해진다는 것을. 폭력 행사는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긴 하지만, 명확하게 만족을 주는 길은 아니라는 것을. 사랑은 폭력과 반대다. 이해하고 설득하며 생명력을 불어넣으려 애를 쓴다. 이런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은 쉬지 않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를 위해 사랑은 폭력과 달리 '인내'를, 무엇보다 '용기'를 전제로 한다. 실망을 참고 견딜 용기. 잘못되어도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겠다는 용기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강인함만 믿고 걸어가면 된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은 본질적으로 성장의 과정이며 온전해지는 과정이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폭력이 아닌 사랑이 수반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랑을 함으로써 비로소 변화하고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다만 현대 사회에는 삶을 사랑하기 어려운 이유들이 몇몇 존재한다. 이 문제들을 인식하고 개선해 나가야는 것이 현대인의 과제다.
삶을 사랑하기 어려운 이유
첫째는 '결과물/성과에 대한 압박감'이다. 우리는 태어난 직후부터 '과정보다 결과에 집중하는 사회'를 보며 자랐다. 이는 산업 시대 이후부터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굳어져 있다. 하지만 산업 시대 결과를 내는 것은 기계이지 결코 사람이 아니다. 어떠한 결과를 목표로 삼고 삶을 사는 게 아닌, 삶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삶을 사랑한다면 변화하고 성장하며 발전하고 더 자각하여 깨어나는 과정이 그 어느 기계적 실행이나 성과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사랑은 행동,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만족하는 능력이다.
둘째는 '채워지지 않는 사물에 대한 욕심'이다. 물욕은 날로 커지기만 할 뿐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당연했던 사실 중 지금은 모르게 된 것이 있다.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은 장치가 없어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행동의 관료화'다. 팀워크나 집단 지성이라는 듣기 좋은 명칭을 아무리 갖다 붙여도 최대의 경제성을 목표로 개인을 재단해 적절한 집단 구성원 형식에 맞추려 한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잊고 능력과 규율을 지키는 것을 삶을 목표로 삼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삶을 사랑하는 능력이 마비가 된다.
이렇게 보면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 성과를 포기하고 가난해지라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상황과 삶을 사랑하는 데 위협이 되는 요소를 깨닫는 것이다. 성과와 물질적 사물을 주인으로 두지 말고 있어야 할 것에 두는 것이 필요하다.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사물로 바꿔서는 안되며 사물의 주인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어떻게 하여 삶을 사랑하게 할 것인가
삶에 의미 부여를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제가 있다. 첫째는 19세기 이후 심화되어온 우리의 자세를 깨닫고 극복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지성(사고)와 감성(감정)을 분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 자세한 내용은 본문 참고. 둘째는 창조적 인간이 되어 '소비'와 '수용'의 태도를 극복하는 것이다. 창조적 인간이란 예술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뿐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고 대답하는 자세도 포함이 된다. (가령 창조란 책을 읽을 때 책 내용은 물론 내 안에서 무언가 깨어나는 것을 느끼고 새로운 생각이 함께 떠오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삶을 사랑할 수 있다. 사람을 사랑하는 비법은 없지만 충분히 배워나갈 수 있다.
삶에 대한 구체적인 제시 내용은 책에서 직접 확인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결론적으로 에리히 프롬은 우리가 개인적인 성장 분야에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도록 상기시킨다. 자신의 심리적 가치, 자존감, 독립성에 투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삶을 사랑할 수 있으며, 나아가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것을 증진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에로스의 종말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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