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한 삶을 사는 방법
드뷔시를 듣는다. 고상하고 싶어 듣는 건 아니고 최근 들어 서사가 있는 음악에 안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클래식을 듣지 않는 날이면 공간이 조용해질 수 있도록 내버려 둔다. 적막은 무언가가 제 자리에 정돈된 느낌을, 차분한 느낌을 준다. 같은 이유로 밤에는 창문을 열어 조용히 차만 지나가는 도로를 본다. 바깥을 내다보는 내내 바람이 살랑거린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이 차이를 맞으며 뒤에서 앞으로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바라보며 '사는 건 참 규칙적이고 자연적이구나' 생각이 든다.
예전엔 쿵짝거리는 힙합이나 인디를 들었는데. 요즘엔 왜 이런 것들이 당기는지. 조심스럽게 '나이가 든 건가' 생각해 본다. 하지만 그다지 마음에 드는 답이 아니다. 생물학적 노화로 없던 게 갑자기 생기는 건 주름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노화가 내 취향까지 바꿔버리는 건 참을 수 없다) 이후 나는 갑작스러운 취향 변화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최근 좋아하게 된 적막과 바람, 클래식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들이 있다. 고상함? 아니, 느긋함과 천천한 속도! 위에서 아래, 왼쪽에서 오른쪽, 기-승-전-결 규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반복되는 방식이 닮아 있다. 익숙하고 예측 가능한 것들은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또 이런 것들은 복잡한 사유 없이 잘 느끼기만 해도 되는 것들이다. 바람은- 음악은- 적막은- 온전히 느끼기만 해도 충분한 가치를 보장받을 수 있다.
반면 산다는 건 불확실함의 숲에서 속절없이 헤매며 각자의 길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어렸을 땐 완벽하지 않더라도 입시나 취업이라는 목표가 있었는데, 이제는 스스로가 삶의 목표를 정하고 주도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넋 놓고 있다가는 사는 데로 살아지기 때문에 매 순간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한다.
사회 초년생 때 그럴듯한 목표를 잡았었다. 능력을 펼쳐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고, 멋진 커리어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 멋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런데 사실 이 목표들은 흐릿하거나 진짜 욕망에 빗겨나가 있는 것들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랬다. 최근까지 멋진 직책, 짱짱한 커리어, 높은 연봉을 쫓으며 달려왔으나 생각보다 그 열매들이 허무하단 것을 느꼈으니까. 물론 그 간의 목표로 달려왔기에 먹고살 만한 여유가 생긴 것도 사실이지만, 정확히는 그것들이 남은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닐 수 있겠구나를 깨달은 것이다. 이 사실을 알기까지 5년이 걸렸다.
긴 시행착오를 거치며 그동안 목표로 했던 것들을 싹 다 지웠다. 그리고 다시 불확실한 삶 속에서 달려가 볼 만한 목표들을 하나씩 세워보고 있다. 대리병도 아니고 이제 와서 삶의 목표를 다시 세우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했다. 이런 고민을 주변에 이야기하면 다들 자신만의 이야기를 해줬다. 안타깝게도 하나같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것도 시행착오를 거치다 보니 알게 되었다. 내가 어떤 삶을 살지는 스스로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답을 얻어내야 한다는 것을. 내가 정한 길이어야 딴 생각이 안 든다는 걸 말이다.
여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내 안이 소란스럽고 답답하다 보니- 안정적이고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것들을 찾게 되었다는 게 내 결론이다. (적어도 생물학적 노화보다는 사회적 노화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말씀!) 내 속은 여전히 시끄럽지만 조용한 풍경과 노래를 들으면 내 삶이 안정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종종 몽상을 한다. 내 삶도 저기 지나가는 자동차처럼 곧은 길이면 좋겠다. 바람이 불면 나무가 살랑거리듯, 남은 내 생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생활이길. 내가 사유하는 만큼 언젠가는 답을 내릴 것이기에, 나중에 얻을 그 평온함을 기대하며 지금의 취향들로 잠시나마 위안을 받는 것이다. 미래의 나는 규칙적이고 자연스러운 삶의 기준을 세우고 평화롭게 살아갈 거라 믿는다.
사실 글 쓰는 내내 10개도 더 되는 문장을 쓰고 지웠다. 삶의 목표는 무슨, (생각이 너무 많아서) 이 순간 내가 느끼는 생각을 표현하기에도 벅차다. 흠. 아직도 나는 속이 시끄러운 골치 아픈 아이지만, 조용해진 내 취향들과 소중한 내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언젠가 확실한 내 삶의 기준을 만들어 내지 않을까?
그래서 확실한 삶을 사는 방법이 뭐냐고? 긴 글 쓰고 미안하지만 모르겠다. 혹시나 답을 알게 되면 다시 써야겠다. 오늘의 나는 그저 <노화된 새로운 취향과 함께 확실하고 안정적인 하루를 살아가며> 탁월한 삶의 기준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글과책 > 수필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젠가 꿈을 꾸는 고양이 (1) | 2023.11.14 |
---|---|
일희일비하지 않는 삶 (1) | 2023.11.13 |
귀여운 삶의 의미 (1) | 2023.11.13 |
선배가 되고싶다 (1) | 2023.11.02 |
마음의 그릇을 비울 수 있다면 (1) | 2023.1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