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라는 세계 독서 에세이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독서 리뷰
어린이는 어른보다 작다. 그래서 어른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큰 어른과 작은 어린이가 나란히 있다면 어른이 먼저 보일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가 어른의 반만 하다고 어른의 반만큼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아무리 작아도 한 명은 한 명이다. 하지만 어떤 어른들은 그 사실을 깜빡하는 것 같다.
내게는 볼드모트 같은, 금기라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2가지 있다. 하나는 블리치 애니메이션의 한 캐릭터를 코스프레한 사실이고, 하나는 4천 원이 든 지갑을 하수구에 빠뜨려놓고 학원비 20만 원이 들었다고 거짓말해서 소방차가 출동해 내 지갑을 꺼내준 일이다. (아직까지 우리 엄마는 이 사건을 모른다) 그 외에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어렸으니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얼탱이 없는 일들 투성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애틋하고 또 웃음이 난다.
한 때 어린이였던 시절을 건너온 우리, 어린이를 양육할 수도 옆에 두고 살아가기도 한 우리에게 사실 어린이는 어려운 존재가 아닐 텐데, 사실 우리 삶에서 어린이는 가깝고도 먼 존재인 것 같다. 어린이는 전용 시설에 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단 한 번도 든 적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 방어적인 마음을 가진 누군가를 누그러뜨려야 한다면 나는 주저 않고 이 책을 선물할 것이다. 한때 어린이였던 우리가, 지금 어린이를 어떻게 보고 있고 또 대하고 있나에 대해 계속 묻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책. 글은 김소영 작가 <어린이라는 세계>에 대한 독서 기록이다.
독서 교실을 운영하는 작가가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쓰게 된 이 책은 어린이 세계의 해설서 같은 느낌을 준다. 정확히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세계의 정보다. 어린이는 우리가 건너 온 세계니까 말이다. 어느 날 대학교로 옥스퍼드를 갈지 캠브리지에 갈지 고민하는 하윤이나, '사람 백과사전' 책을 읽고 서로 몸이 달라도 반겨 주자! 같이 놀자! 고 말하는 예지를 발견할 수 있다. 갑자기 닫히는 개찰구를 무서워하거나 지진을 무서워하거나 엘리베이터를 무서워하는 어린이를 발견하기도 한다. 언젠가 내가 한 번씩 했던 경험 같아서 쿡쿡 웃으면서 책을 읽었다.
사실 책의 킬링 포인트는 어린 시절의 공감이 아니라, 어린이를 '약한 아이', '미숙한 존재'가 아닌 '동등한 한 사람'으로 대하는 장면이다. 책 앞부분에는 어린이에 큰 감정 이입을 했다면 중반부부터는 '그렇게 공감했던 어린이를 너는 왜 그렇게 대해?'라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작가가 나를 꾸짖지 않는데 정곡을 찔리는 느낌을 받았다. 예컨대 어린이들은 어려서 잘 못한다고 지레짐작한다든지, 지켜주어야 하는 이유가 약하고 무력한 존재로 생각해서였다든지, 어려서 뭘 모른다 그래서 어른인 우리가 다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들이 그렇다. 알고 보니 다 편견이었다. 사회에서 만든 어린이 프레임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책이 새로웠다. 김소영 작가의 어른스러운 태도를 읽으며 어린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책에서 느낀 소영 작가의 어른스러움이란 이런 것들이다.
신발 끈을 묶는 연습을 하는 현성에게 작가는 '나중에 크면 신발 끈을 잘 묶게 될 수 있을 거야'라고 이야기했다. 이내 얼굴이 화끈거린다. 현성이는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은 빨리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릴 뿐이에요"라고 대답했다. 작가는 어린이는 나중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상기하게 된다.
작가는 여행 중 한 서점을 들린다. 한 가족 손님이 책을 고르고 있었다. 그런데 계산대 앞에서 어린이가 자기가 고른 책을 아빠에게 주지 않고 있었다. 의아해하고 있는 와중에, 서점 주인은 어린이에게 "따로 계산해 드릴까요?" 또는 "따로 담아드릴까요?"라고 응대했다. 어린이는 말없이 끄덕거렸다. 작가는 이 존중의 현장을 보며 책방 주인의 어른스러움에 감탄한다.
책을 읽는 내내 독서 교실의 아이들을 이 얼마나 존중받는지 알 수 있었다. 작가는 궁금한 점이 있을 땐 아이들에게 정중하게 부탁을 하거나 기대와 다르게 대화가 흘러갈 때는 양해를 구하곤 했고, 진심으로 고마워하거나 진심으로 사과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작가의 존중을 받고 곧 비슷한 존중으로 되돌려준다. 사실은 아이들도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며 품위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존재들이었다. 어린이였던 우리들도 한 사람으로 존중받고 싶어 했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우리의 어린 시절은 대부분 실패했더라도 말이다)
어린이를 무시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는 게 첫 번째 지성이었다면, 작가가 알려준 두 번째 지성은 <자라나는 세계가 무너지지 않고 올바르게 유지될 수 있도록> 어른인 우리가 교정하고 기꺼이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어린이가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어른의 말을 잘 듣는 게 착한 어린이의 전부가 아님을 알려주는 일, 부당한 대접에 이상함을 느낄 수 있도록 자각을 높여주는 일, 어린이 의견을 묵살하지 않는 일, 외로운 어린이들을 소외시키지 않는 일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일들은 겉보기에 거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소한 말과 인식들로 이루어져 있다. 생각보다 어린이를 위해 우리가 기꺼이 해내야 할 일들이 많아서 놀랐다. 또 어리다는 이유로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그들의 권리와 존중을 묵살했는 지도 알게 되었다. 작가가 나를 혼내는 것도 아닌데 사회가, 내가 해야 할 일을 묵인하고 있었던 것 같아 2차 찔림을 당했다.
어린이들에게는 서운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어린이날이 어린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날에 그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어린이가 '해방된 존재'가 맞는지 점검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방된 사람들답게 자유로운지, 안전한지, 평등한지, 권리를 알고 있으며 보장받고 있는지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점검하고 잘못된 것을 고쳐 나가는 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어린이날은 지금보다 훨씬 거창한 하루가 되어야 한다.
어떤 어린이는 여전히 TV로 세상을 배운다. 주로 외로운 어린이들이 그럴 것이다. 어린이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들이 이기는 모습을, 함께 노는 즐거움을, 다양한 가족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가족이 아니어도 튼튼한 관계를, 강아지와 고양이를, 세상의 호의를 보여주면 좋겠다. 세상이 멋진 집이라고 어린이를 안심시키면 좋겠다.
읽는 내내 겸손하고 다정한 마음으로 배려하는 김소영 작가의 됨됨이가 느껴졌다. 넘치는 애정과 자존이 있어야 가능한 그 겸손함. 나도 꼭 이런 태도를 가진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
이렇게 보면 사회적인 책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책의 8할은 아이들의 귀여운 에피소드 하나하나 담겨있어 너무 귀엽고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어린이날을 맞아 가정의 달 5월에 읽어보면 어떨까 싶다. 양육자라면 강력 추천, 사회의 어른으로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주기에 양육자가 아닌 분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매년 다시 읽고, 이번에 독서 모임으로 또 한 번 읽었다. 3번 정도 읽었으니 이 정도면 말 다 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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