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택 근무와 디지털 노마드
코로나19 이후에 우리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개학이 연기되거나 온라인으로 수업이 대체되었고, 배달 음식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쓰레기는 이제 처리할 수 없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 사이 슈퍼들은 적자를 면치 못했고 우리 엄마는 쿠팡으로 물건을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재택 근무를 시작했다.
첫 재택 근무는 3월 이었다. 곡식이 넉넉한 우리 회사는 최초 일주일 간은 유급 휴가를 주었고, 이후는 격주제로 재택 근무를 운영했다. 유급 휴가로 일주일을 쉰 후 시작한 재택 근무라서 그런지, 재택 근무가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대부분은 일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 팀에서는 회사에 출근한 인원 중심으로 업무를 처리했다. 오히려, 해야 할 문서 작업이 있는 경우 회사에 출근하는 날 몰아서 처리했다. (당시 익스트라넷 환경이 불편했다.) 나 역시 일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중요한 일들은 회사에서 처리했다. 그렇게 1달 간의 운영끝에, 회사는 단 1명의 확진자 없이 정상 근무로 전환하였다. 사무실로 출근하는 와중에도 사우들은 다음을 대비하기 위해 근무 환경 개선을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안타깝게도 확산세는 8월 중순부터 다시 늘어갔다. 우리 회사는 2주 전부터 다시 재택 근무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간의 요구로 작업 환경이 조금 개선되기는 했으나, 대부분은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달라진 점은, 이제는 재택 근무를 하는 사람들도 업무를 중심적으로 하기 시작했다는 것. 아마 특수로 여긴 3월의 상황이 반복되자 매니저들도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같다. 사람들은 폰트가 깨졌지만 메일을 보내고, 색은 못바꾸지만 표를 만들었다. 5시간이 걸릴지언정 문서를 썼다. 하나 둘 씩 이런말을 꺼냈다. '되네?!'
음성 회의도 나름 성공적이었다. 오디오가 물리기도 했지만 회의는 깔끔했고, 오히려 회의 내용을 기록하면서 편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근무 환경이 조금만 더 개선된다면, 재택 근무- 디지털 노마드가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
디지털 노마드- 는 장소에 제약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디지털 유목민이라는 뜻이지만, 아직은 '집에서도 할 수 있는 부업'의 느낌이 더 강한 것 같다. 블로그를 통한, 스마트 스토어를 통한, 인터넷 클래스를 통한 디지털 노마드, 그게 아니라면 내가 엄청 잘나서 프리랜서로 일할 수 있어야 가능한 디지털 노마드. 난 그렇게 이해했다. 그런데 재택근무가 잘 안착된다면, 이름에 걸맞는 진짜 디지털 노마드가 되는게 아니냔 말이지!
택도 없다는 건 알지만, 재택근무를 하는 디지털 노마드 직장인에 대해 망상을 그려본다.
[AM 10:00] 나는 전날 새벽 2시까지 유투브를 보다가 잠이 든다. 평소 같았으면 일찌감치 TV를 끄고 잠을 자기 위해 노력했겠지만, 이제 출근을 하지 않으니까. 주말에만 누리던 호사 - TV를 켜논 채 잠이 든다. 영상에서 들리는 백색 소음, 창문을 너머 들리는 차 소리. 잠이 오지 않으면 오지 않는대로 시간을 보내다 자연스럽게 잠이 들었다.
[AM 10:10] 오늘은 아침 10시가 다 되어 눈을 떴다. 명목 상으로는 아침 10시까지 출근이니, 부랴부랴 작은방으로 향해 컴퓨터를 켰다. 출근 버튼 누르기. 그리고나서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어제 맥주를 마시고 잤더니 갈증이 영 가시질 않는 것 같다. 몸도 찌뿌둥하고 정신도 차릴 겸 일단 샤워부터 해야 할 것 같다. 메신저를 보니 앞으로 30분 동안은 나를 찾을 낌새가 없어 보였다. 메신저에 몇 마디 한뒤 눈치 싸움을 끝낸 나는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AM 11:13] 시간이 꽤 흘렀지만 다행히 아무도 날 찾진 않았다. 뭐 개인에게 정해진 일들만 잘 끝내면 되고 각자의 상황들을 잘 아는지라 누가 먼저 터치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오늘은 퇴근 전까지 보내야 할 문서 초안이 있고, 오후 4시에 실 회의가 있다. 실무자들끼리면 음성 회의만 할텐데 직책자들도 같이 있는 회의라 화상으로 진행해야 된다. 사실 그래서 샤워를 한 것도 있다. 이제 진짜 일 시작해야지.
[AM 11:48] 아 일하기 싫다. 커피 한 잔만 먹고 시작해야지.
곧 점심 시간인데 떡볶이라도 시켜 먹을까? 인스타 뒤적 뒤적, 게임 자사 돌려놓아야지 깜빡했다.
[PM 05:52] 원래 실 회의 말고는 공식 일정이 없었는데, 신규 TF가 생겼단다. 간단히 논의하자는 미팅은 2시간이나 걸렸다. 그것도 실 회의 때문에 겨우겨우 끝난거다. 실 회의도 2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벌써 오후 6시가 다 되어가는데 보내야 할 초안은 절반도 못했다. 팀장한테 메신저를 보냈다. "팀장님. 오늘 회의 일정때문에 문서 작업을 다 못 끝냈는데, 내일 아침에 확인하실 수 있도록 해도 될까요?", "ㅇㅇ 그러세요", "넵 감사합니다 ^_ㅠ" 하ㅎ핳하ㅏㅎ 결국 야근이군
[PM 07:26] 야간 작업은 역시 맥주와 함께!!!!!!!! 얼마 전에 사온 에델바이스 복숭아 맥주와 김부각만 있다면 나는 두려울 것이 없지!!!! 호로록 호로록 끝내야지. 목표 시간은 9시!!!!! 가즈아!!!
[PM 10:05] 오후 10시. 생각보다 조금 늦긴 했지만 내가 봐도 그럴 듯한 제안서가 나왔다. 뿌듯하다. 메신저로 같이 협업하는 실무자에게 내용을 공유했다. 퇴근 버튼을 누르고 공식적인 업무를 끝냈다. 벌써 10시긴 하지만, 괜찮아. 아직 시간 많으니까. 나의 저녁은 이제 시작이댜햐ㅎ햫ㅎ하
막상 써보니 생각보다 괜찮고 현실 가능성도 꽤 있는 것 같아서 좀 놀랐다. 지금 내 재택 근무 사이클과 비슷한 건 안비밀. 지금 시국이 엄중하지만 않았다면,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서 작업하는 내용도 썼을텐데 아쉽다. 직장, 본업을 중심으로 하는 디지털 노마드. 꽤 여유로울 것 같다.
물론 회사 근로 시스템에서 조정되어야 할 부분도 있을 것 같다. 예를 들면 먼저 일 8시간, 주 40시간이라는 필수 근무가 조정되어야 한다. 물론 우리 회사도 유연 근로제를 채택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아닌 곳도 많으니까. 디지털 노마드를 위해선 회사 전반에서 근로자 재량에 따라 근무 시간 조정이 가능하도록 변화해야 한다. 대신 근로 시간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필요할 거다. 근로자들은 출/퇴근 버튼을 눌러 관리하되, 전일의 기록은 모두 매니저들에게 전송되어 일부 근로자의 어뷰징을 막는 형태로 운영하면 좋을 것 같다. (매니저들이 조금 수고롭긴 하겠지만, 땡땡이 안치는 조직원을 관리하는 것도 매니징 아닐까!)
또, 주 40시간을 초과한 경우 역시 매니저 승인하에 추가 근무를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개발되면 좋겠다. 40시간을 애매하게 채우고 시간을 더 벌려는 근무자의 어뷰징은 어떻게 할까?가 화두에 오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은 사실 굳이 디지털 노마드가 아니라, 근로 시간을 체크하는 순간부터 발생하는 문제가 아닐까. 음 역시 이 부분도 매니저한테 토스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악착같이 40시간을 요령있게 채우고 추가 근무를 신청하더라도, 실무자의 업무 결과물에 따라서 정당한 시간을 투자했는지를 검토해 볼 수도 있으니까. 옆 실의 한 직책자 분은 '근무 시간을 기록하고, 40시간을 기준으로 근로하는 회사의 방침에 따라- 40시간 동안 업무를 완성도 있게 끝내는 속도도 평가의 한 부분이 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절대적으로 많은 일을 준다면 어불성설이지만, 적당한 개인의 업무라면 똑똑하게 제 시간에 끝내는 것도 합리적인 것 같다. 무엇보다 야근으로 일하는 것을 대신 증명하는 분들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루팡하면서 직책자에게 초과 근무를 왜 해야되는지 설명할 바에 그냥 끝내는게 더 마음이 편한 것 같다. 뭐 여기까지는 개인 생각이니까 토달지 말기. 내가 의사결정권자도 아니니까.
다행히 확진자 수는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다음주나 다다음주 부터는 정상 근무일이 늘어날 것 같다. 재택 근무는 한 편으로 좋지만, 또 업무 측면에서는 불편한 점이 많아서 다시 출근하더라도 불만은 없을 것 같다. 다시 사무실로 출근하고 이후 일상도 정상으로 돌아가더라도, 언젠가 코로나 없이 재택 근무나 디지털 노마드를 실현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혹시 올 지도 모를 날을 기약하거나, 다신 오지 않을 지금의 근로 환경을 기록하고자 이곳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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