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사업의 져니맨
누구나 그랬겠지만, 나 역시 어린 시절 '횡단보도 흰 선 밟기 놀이'를 자주 하던 어린이였다. 흰 선 밟기에 실패하면 '아까는 연습 이제는 진짜'라고 다짐하며 마음속으로 다시 '시작!'을 외치고 선을 밟았다. 내가 만족할 때까지 스스로에게 무한한 기회를 주는 그 놀이를 할 때면 목숨이 999개인 슈퍼 마리오가 된 것 같았다. 약간 망하더라도 걱정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실패는 없던 일이 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
과연 직장 생활도 그랬음 얼마나 좋았을까. 직장인에게 커리어란 '걸어온 길'이라는 멋진 의미도 있겠으나, 애석하게도 내가 경험한 커리어는 '흰 선 밟기에 실패하면 무효 처리가 되지 않는, 이력의 흔적이 분명하게 남는 경기 기록'에 가까웠다. 낭만적이기보다는 무시무시한 단어였다. 애초에 번복이 안되니까 사람들도 커리어를 두고 꼬였다, 망했다는 표현을 자주 썼던 게 아니었을까? 종종 선배들에게 듣던 '커리어 패스'라는 단어는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번엔 목숨이 단 1개밖에 없는 슈퍼 마리오를 시작해야 했다.
커리어가 경기 기록이라면 직장인은 스포츠맨이다. 실제로 스포츠에서는 하나의 클럽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 사람을 원클럽맨, 기회를 보며 여러 클럽으로 이적하는 사람을 '져니맨'이라 부른다. 내 커리어의 개인적인 콤플렉스가 있다면 스스로를 게임 사업의 져니맨이라 여긴다는 점일 것이다. 커리어를 되돌아보면 보이는 이력은 나쁘지 않았지만 잦은 이동 탓에 우직하게 하나의 분야를 파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져니맨이 클럽에서 로열티를 시험받는다면, 나는 이도 저도 아닌 경력을 쌓은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큰일 났다. 커리어의 목숨은 1개뿐인데 큰일났다.
커리어의 시작은 게임 회사 신입 공채였다. 사업 PM으로 일을 하고 싶었으나, 내가 실제로 배치받은 곳은 비라이브 부서였다. 정확히는 게임 IP를 활용한 MD를 개발/판매하는 곳이었다. 옆팀은 웹툰 플랫폼을 그 옆팀은 야구단을 관리했는데, 흔히 사업 확장 과정에서 신설되는 비라이브 조직은 대부분 회사 메인과 동떨어진 일을 했다. (그리고 회사가 어려워지면 제일 먼저 철수하는 곳이ㄷ..)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모두 좋은 분들이었으나 게임 회사에서 MD일을 한다는 게 커리어적으로 마음에 걸렸다. 딱 1년 뒤, 나는 조직 리더에게 게임 서비스를 하고 싶다는 승부수를 뒀다. 주니어의 이동 선언이 호락호락할리 없었다. 갖은 객기 끝에 결국 쫓겨나듯 팀 이동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동한 곳은 운영 부서였다. 이곳에서 나는 게임에 진심인 사람들이 얼마나 질 높은 서비스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체감했다. 예전에 겜잘러에 치이는 뱁새 이야기를 썼는데 이 사람들이 그 황새들이다. 운영은 흔히 아는 GM/CM이 있는 팀이자 24시간 오픈되는 게임 라이브를 총괄하는 부서다. 어깨너머 트래픽이나 개발 구조에 대해서 알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의사소통의 최전선에서 적극적으로 이슈를 다뤄볼 수 있었다. 게임을 다루는 전문가로의 책임감과 자부심을 동시에 가지게 했다는 점에서, 그때의 운영 경험은 내 커리어 패스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 후 사업 PM을 하고 싶었던 욕심을 이해해 주셨던 운영 실장님은, 런칭을 준비하는 프로젝트에 나를 추천했다. "가서 운영 출신 사업 PM이 얼마나 잘하는지 보여줘"라는 따뜻한 말도 잊지 않으셨다. 2년 반 만에 드디어 내가 바라던 사업 PM 커리어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사업 부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돈을 벌고 돈 쓰는 일을 하는 곳이다. 시장성을 고려하여 게임을 폴리싱하는 한편, 수익 분배도 하고 맨먼스(M/M)도 까다롭게 다뤄야 한다. 아무래도 의사 결정을 위한 '기획'과 실행을 위한 '협의'가 8 할인 곳이라, 운영보다 훨씬 더 비즈니스적인 곳이었다. 말 그대로 게임 사업. 근데 나한텐 이 일이 찰떡이었다. 게임의 애정과 디테일을 살리는 일보다는 사업 방향을 다루는 일을 할 때 더 마음이 편하고 결과물도 좋았기 때문이다. 운영 경험이 뜻깊었다고는 했지만, 사업 PM이 정말 잘 맞다는 생각이 들 때면 왜 이리 돌아왔나 또는 깨끗하게 PM으로 커리어를 시작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억울함을 느꼈다.
그토록 바라던 사업에 왔으나 PM이 되었다고 커리어가 완성되는 건 아니었다. 이제는 숙련된 PM이 되어야 했다. 이직 후에는 인하우스와 퍼블리셔 사이에서 한참을 헤맸다. 게임 개발을 직접 했던 첫 회사와 달리, 개발사와 계약을 맺어 게임을 출시하는 퍼블리싱은 모르는 일 투성이에 PM 역할도 확연히 달랐다. 그 차이가 드러날수록 스스로가 물경력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겨우 퍼블리셔에 적응했더니 최근에는 MMORPG가 아닌 다른 장르의 프로젝트를 맡았다. (나는 7년 간 MMORPG만 서비스했다.) 게다가 처음 다루는 글로벌 시장까지. 이렇듯 잦은 이동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연달아 맡다 보니, 쌓인 연차가 있음에도 항상 0에서 시작하는 감정을 느낀다. 기회를 얻는 건 늘 짜릿하지만 솔직히 피곤한 일이다.
누군가는 하나의 서비스를 장기간 맡으며 안정적으로 자신의 무기를 만든다면, 나는 져니맨이 되어 원하는 것을 헤집고 다니며 넓고 얕은 경험을 쌓았다. 화려한 런칭 경험은 포트폴리오에서 빛이 났으나, 짧은 부서 경험은 시니어에게 기대하는 묵직함과 노련함을 증명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조직에서 깊이감을 담당하는 구성원으로 활약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커리어는 고칠 수 없기에 늘 안주하지 않았고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지만, 지금의 커리어가 최선이고 이상적이냐 묻는다면 자신이 없다.
다만 그럼에도 나의 지저분한 이력과 불안한 마음을 글로 남겨두는 이유는, 이미 중간까지 그려진 어중간한 커리어 패스에도 부단히 움직이는 내 모습에 의미를 두고 싶어서일 것이다. 흰 선 밟기 놀이하듯 새롭게 커리어를 시작하지 못하고 꼬불꼬불한 길을 걷더라도, 지난 1년보다 확연히 나아진 내 모습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커리어가 망했다 여겨질 때도 멈추지 않고 걸었더니 느리지만 좋은 기회가 주어졌으니까. 앞으로 나아가는 한 절대 퇴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천천히 스며드는 그 믿음을 경험한 후부터는 현재에 충실할 것을 첫 번째 원칙으로 삼았다. 그랬더니 어두운 날이 찾아와도 마음 끝까지 어둡지는 않았다.
몇 년 전까지 커리어 패스를 잘 만든다는 것은 승진하거나 화려한 이력으로 고액 연봉을 받는 것이라 생각했다. 대부분의 경우 맞을 것이다. 다만 경험하며 깨달은 또 다른 정의가 있다면, 앞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 길을 가든, 깊이를 파던 넓이를 파던, 스스로 생각하고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 궤적 자체가 아름다운 이력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뾰족하지 않았던 넓은 커리어가 이제는 대체 불가능한 나의 강점이 되었다. 어느 점(이력)을 찍더라도 이어진 선(경험)은 항상 운동 방향을 가지고 나아갈 것이다.
처음엔 내가 얼마나 부랑자스러운 유랑 생활을 했는지를 웃기면서 처량하게 쓰고 싶었는데.. 결국 이런 모양의 글이 되어버렸다. 하하. 유랑 생활하니 생각나는데, 본래 유랑이란 흐르는 강물을 따라 여기저기 머문다는 뜻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고이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흘러가며 앞으로도 여기저기 머무는 슬기로운 유랑 생활을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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